광우병 불안

 

광우병에 대한 불안은 정확히 히스테리적입니다. 미국의 소가 실제로 위험하냐는 사실판단과는 상관없이 광우병에 대한 불안은 증가됩니다. 듣고 있자면 변형 프리온은 거의 악마가 살포한  최종병기 같지 않나요? 
광우병이라는 카니발리즘의 사생아와 같은 질병은 모든 인간이 자연에 대해 지고 있는 부채의식을 건드립니다. 광우병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징벌적인 성격과(그것은 자연의 섭리를 어긴 결과이다) 거대한 자본-깡패인 미국에 대한 불만, 이명박을 수뇌로한 실용정부에 대한 불신은 마치 삼위일체처럼 이 불안의 삼각형을 완성합니다. 여기에 의해 촉발된 공포는 마치 관동이나 아우슈비츠처럼 비이성적으로 확산됩니다.
이렇게 과잉한 불안과 분노의 단계에서 미국의 소가 위험하냐는 것은 실로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관동이나 아우슈비츠의 광기가 실재의 '조선인'과 '유태인'과는 무관하게 일어났다는 점과 일치합니다. 의처증을 가진 남편이 실제로 아내의 부정의 증거를 발견한다고 해도 그의 의심이 강박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의처증의 본질은 실질적인 부정의 유무가 아니라 정확히 그가 가지고 있는 과잉한 불안에 있습니다. 의처증 환자에게 아무리 논리적으로 아내의 무죄를 설명해도 쓸모가 없는 것처럼, 이렇게 전염병처럼 창궐한 괴담에 과학적인 설명은 사실 쓸모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확인했다시피, 이러한 설명은 아주 쉽게 그 과녁을 비켜갑니다. "그래도 혹시 알아?", 혹은 "미국놈들을 어떻게 믿겠어." 등등.

저는 이러한 불안이 히스테리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과잉한 불안은 외상에 의해 촉발된 불안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즉 우리의 이익(생명)추구는 실용정부에 포섭당했습니다. 우리는 어느정도 스스로의 욕망을 희생하는데, 바로 그 희생(비정규직에 대한 양보, 노동조건의 악화 등)이 고용이라고 하는 비실업의 상태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이명박이 제시하는 환상은 매우 억압적인데, 그것은 네 이익을 (자본에게) 양보하라는 명령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겁을 주는 방식입니다. 기업이, 자본이 안 되면 너희도, 노동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희생의 강요는 FTA, 그리고 소고기 협상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명박 정부가 가지고 있는 청사진. 우리의 농업시장을 개방(희생)함으로써 삼성, 현대 등이 가전제품과 자동차를 좀 더 잘 팔 수 있게 만들겠다는. 이것은 희생을 전제로 하는 미래입니다. 이번 소고기협상의 경우 실용정부는 희생의 카드를 국민의 (가능한) 위험으로 내민 것인데,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이익(생명) 추구는 포섭당함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 외상적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이명박 실용주의의 냉정한 실체를 경험합니다. 우리의 히스테리적인 반응은, 바로 거기에 대한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정확히 프로이트 식으로 억압된 것의 귀환입니다.

사실 더 흥미로운 분석은 아마 광우병 자체가 아닐까요. 광우병은 그야말로 자연의 폭동입니다. 그 자체의 법칙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된 '자연'이 우리에게 복수를 한다는거죠. 여기에서 우리는 더 본질적인 억압된 것의 귀환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변형 프리온이 그토록 위험하고, 우리의 종말은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하고, 그것이 제 3세계의 극단적인 빈곤과 무관한 몇몇 부국들의 치사스러운 식습관 때문이라면, 아아. 이는 얼마나 또 통쾌하고도 무시무시합니까. 정말 이것을 소재로 호러영화가 하나 나와도 될 것 같아요.

by 이녘 | 2008/05/15 01:03 | For society | 트랙백 | 덧글(0)

극사적에로스

 

저는 과격한 영화를 좋아합니다.  눈이 질끈 감겨지도록 적나라하고 과격한 영상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사지절단의 강도에 열광하는 호러 팬의 감수성일 수도 있겠어요. 하여튼 저는 <데드 얼라이브>의 하드고어나 <감각의 제국>과 같은 포르노그래피를 즐겁게 감상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저에게도 <극사적에로스>는 다소 힘이 들었습니다. 

일단 영화 이야기를 해볼까요? <극사적에로스>는 모호한 작품입니다. 이것은 인간 하라 카즈오의 조금은 의뭉스러운 고백인 것처럼도 보이고, 살짝 시치미를 뗀 채 오키나와라고 하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을 보여주는것 처럼도 보입니다. 사실 둘 다 아닐 수도 있어요.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극사적에로스>는 성공한 다큐멘터리는 아니거든요. 미유키를 바라보고 있는 하라 카즈오의 시선은 대단히 조심스럽고도 솔직하지 못하고 때때로 지나칠 정도로 자학적이고 자기연민적입니다. 이것은 위악적인 자기현시를 스타일로 했던 일본 사소설 이래의 전통일 수도 있고, 어느 소심하고 못난 예술가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예전의 여자친구, 그리고 지금의 여자친구가 출산을 하고 있는데 하라 카즈오가 하는 일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정확히 렌즈 너머에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하라 카즈오'의 부재를 강하게 암시합니다. 거기에는 인간이 없습니다. 그는 궁상스럽게 훌쩍이는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기도 하고, 자신에 대한 미유키의 악담으로 다큐멘터리의 상당 부분을 채우지만 그것은 솔직함이기보다는 하나의 위악적인 포즈처럼 느껴져요. 그렇다고 그 이면의 진심이 느껴지지도 않고...
그의 카메라가 잡아내고 있는 오키나와의 모습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잡아내고 있는 것은 대개 오키나와의 여성들입니다. 모두 미군을 상대로한 유흥업소의 여성들이에요. 그녀들은 모두 섹스를 하고 아이를 갖고, 낳거나 지웁니다. 하라 카즈오의 옛 여자친구인 미유키도 어느 미군과 관계를 가지고 혼혈아를 출산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의 '여자'를 승전국-미국에게 빼앗긴 일본 남성의 소심한 정치적 고백인걸까요? 일본 영토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과 그 주둔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오키나와의 경제, 유흥가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진짜 이 영화의 주제인걸까요? 뭐, 그럴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해석으로 이어지기에 <극사적에로스>의  힘은 조금 약합니다. 정치적인 다큐멘터리가 가질 수 있는 솔직함이라는 미덕이 없거든요. 하라 카즈오의 태도는 너무 조심스럽고, 또한 의뭉스럽습니다.
<극사적에로스>가 힘이 들었던 이유는, 후반부에 연이어서 나오는 두 차례의 출산 장면 때문입니다. 방바닥에 비닐과 신문지를 깔고 배를 손으로 꾹꾹 눌러대면서 홀로 아이를 낳는 미유키의 모습은 정말이지 보기 힘들어요. 힘을 주기 좋은 자세를 찾기 위해 누워도 보고, 앉아도보는 미유키. 카메라는 그저 냉정하게 그녀의 국부를 주시하고 있고 시간이 흐르자 거기에서 아이의 머리가 튀어나오고, 으으으, 조금 더 있자 몸도 마저 빠져나오고, 으으으, 태반을 꺼내야 한다며 마지막으로 미유키는 힘을 주고, 아아악. 그 장면이 주는 힘은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생명 탄생의 엄숙함 같은게 아니에요.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한 이 장면은 거의 폭력과 같습니다. 뒤통수를 있는 힘껏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어쩌면 그것은 부모님의 섹스를 우연하게 목격한 아이의 트라우마와 비슷할 수도 있겠어요. 정 반대의 상황이지만...
 
하여튼 저는 이 영화를 즐기지는 못했어요. <극사적 에로스>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데 너무 인색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심지어 저 과격한 출산의 장면이 나올때도 마찬가지에요. 그 과격함에는 솔직함이 없습니다.  이 감독의 속내를 알려면 다른 작품들도 한 번 봐야할 것 같은데... 지금으로서는 <천황군대는 진군한다>를 놓친게 아쉽네요. 아니, 딱 한 번 밖에 상영을 안 할게 뭐에요. 제일 관심이 가던 작품이었는데.

by 이녘 | 2008/05/14 22:18 | For movie | 트랙백 | 덧글(1)

대학로 도어즈

 

성대 가는 쪽 골목에 위치한 도어즈. 저 문을 열면 계단이 나옵니다. 좁고 가파른 계단.


안은 이렇게 생겼어요. 종이조각에 신청곡을 써서 주인 아저씨에게 주면 틀어준답니다. 어느날, LP노래가 듣고 싶을 때 찾아가보세요.

by 이녘 | 2008/03/27 20:38 | For m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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