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잭슨의 영화들

 

저는 지금까지 다섯편의 피터잭슨 영화를 보았습니다. 감상한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반지의 제왕' , ‘데드 얼라이브’,  ‘고무인간의 최후Bad taste’, ‘프라이트너’ ‘킹콩’ 순이 되겠네요.


사실 호러 악동인 잭슨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프라이트너’ 이후의 잭슨 영화들은 다소 실망스러운 경우에 속합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박찬욱 같은 사람이 강우석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서 우리는 분명 이렇게 말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니다’고요.


제가 원하는 것은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시원할 정도의 사지절단, 뒤틀린 유머, 온갖 해괴한 인물이 난무하던 그의 영화는 뒤틀린 재치로 넘치는 유쾌함이 있었습니다. 외계인의 정수리에서 항문까지 뚫으며 통과하고는 “나는 다시 태어났다!” 따위의 대사를 외쳐대던 ‘Bad taste'에 비하면 반지 트릴로지의 인물들은 얼마나 심심합니까? 잭슨영화의 주인공들은 거의 괴물이었다구요! 좀비를 잔디깎이 기계로 갈아죽이고, 외계인의 발에 송곳을 망치질하고, 전기톱으로 학살하고, 어머니란 작자는 거대한 좀비가 되어 아들을 다시 자신의 자궁속에 집어넣으려 들죠. 잭슨은 이러한 소재를 가지고도 근사하게 매끈한 장르영화를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런 호러의 감수성을 갖춘 이가 ’반지의 제왕‘을 찍었다니. 저는 거의 배신감에 가까운 감정을 그에게 느꼈었습니다. 스파이더맨을 찍은 샘 레이미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비슷한 것이지요.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는 늘 최선을 다해 특수효과에 집착하는 감독이었어요. 친구들과 조금씩조금씩 촬영해 7년만에 완성한 ‘Bad taste'에서부터 그의 특수효과에 대한 애착은 유별납니다. 그 특수효과를 써먹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니까요. 연출은 굉장히 거칠고 시나리오는 엉성하지만, 그것이 그 구역질나는 특수효과와 결합하자 하나의 스타일이 되어버리지요. 그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주어진 환경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찾아가는 감독입니다. ’Bad taste'의 각본이나 연출은 분명 엉성하지만 그 외 다른 방식으로는 절대로 찍을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더 여건이 나아진 ‘데드 얼라이브’에서 그는 분명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여전히 폭력과 사지절단의 수위는 높지만, 훨씬 세련되고 풍부한 서브텍스트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지의 제왕은요? 어찌 생각해보면 그것은 완벽히 잭슨다운 영화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엄청나게 과잉하는 스타일의 영화입니다. 반지의 제왕에는 아름다운 것은 매우 아름답게, 흉측한 것은 매우 흉측하게 표현하려는 강박관념마저 느껴집니다. 그 과잉의 정서는 사실 ‘배드 테이스트’나 ‘데드 얼라이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는 여전히 악동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주가 얼마나 근사하게 사람들을 놀래킬 지 몰래 지켜보는 장난꾸러기같달까요.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요.


많은 사람들은, ‘킹콩’에서 그가 보여준 일부 장면들(늪지의 괴충 등)이 영화에는 필요없는 장면이지만 잭슨의 취미 때문에 삽입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말은 일면은 맞고 일면은 맞지 않습니다. 그들은 잭슨이 자신의 취향 때문에 어느정도 영화의 완전성을 희생해가며 그 장면들을 삽입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잭슨은 원래 그런 감독이에요. 바로 그러한 장난이야말로 가장 잭슨적인 재미입니다.  그는 한껏 재주를 부린 자신의 장난이 우리를 얼마나 놀라게 하는지 보고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 충동은 그의 영화에 언제나 흐르고 있었지요. 위 장면같은 외삽들은 잭슨영화를 즐기는 가장 적당한 포인트중 하나 일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 제가 그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을 털어놓자면, 저는 그를 호러전사쯤으로 생각했다는 것이에요. 저예산으로, 자신만의 힘으로 영화를 완성하는 저력. 강렬하고 허무한 스타일. 괴물같은 인물과 시나리오. 그를 오해할 여건은 정말 충분했어요. 하지만 찬찬히 돌이켜보자면 그는 분명 얌전한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는 지구를 폭력으로써 지켜내는 영웅을 묘사하고(배드 테이스트),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백인 남성을 지지하며(데드 얼라이브), 선과 악을 매우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반지의 제왕). 앞의 두 작품은 잭슨 특유의 과잉된 스타일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지만요. 결론적으로 그의 영화에는 악의라는 것이 별로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심지어는 공포증도 보이지 않아요. 이 두개는 호러영화의 핵심적인 감수성인데 말이지요. 미국사회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서브텍스트가 가득했던 로메로의 시체 시리즈를 생각해보세요. 매카시즘적인 공포증으로 뒤범벅된 바디 스내처 시리즈는 어떤가요?

그에게는 정치적인 의지라는 것이 거의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는 반항하는 감독이 아니에요. 물론 정치적으로 분명하고 반항적인 영화가 좋은 영화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요. 하지만 저는 적어도 그가 ‘반항적’인 스타일의 감독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하지만 최근 곰곰이 생각해보자면 그는 반항적인 스타일의 감독도, 반항적인 의식의 감독도 아닙니다. 그는 그저 굉장히 영리하고 재주많은 화이트휴머니즘 감독일뿐이에요.


‘킹콩’에서 해골섬에 사는 원주민들은 얼마나 끔찍한 모습이었던가요? 그들은 충격과 경이로 가득찬 ‘킹콩’의 화면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사유리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는 그렇게 떠들어 대면서도 킹콩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는 왜 침묵했던 걸까요.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서요? 그럴수도 있겠네요.


거기에 콩의 모습을 보세요. 콩은 뉴욕의 정상에서 야성을 뽐내며 문명을 파괴하는 반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반대로 인간에게 매혹되어 정복되고 살해되는 초라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연을 경외하는 척 하며 언제나 죽이고 정복했던 서구문명의 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자연이란 비이성의 다른 말입니다. 그것은 감상되고 경외될 수 있지만 결국 이성을 넘어설 수는 없어요. 잭슨에게 있어 콩을 묘사하는 태도와 원주민들을 묘사하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다. 그 둘은 사소한 차이가 있기는 해도 ‘백인’의 반대항으로 서 있는거죠. 물론 이성과 문명의 반대항이기도 해요.


결국 잭슨은 굉장히 평범한 백인영화를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잭슨의 장점은, 그는 스스로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굉장히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는 킹콩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아주 잘 알고 그것을 통제하고 있어요. 그가 드문드문 보여주는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을 보세요. 그는 자신이 어떤 주제의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고 그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어요. 이것은 분명 좋은 미덕입니다. 그의 편견이 불쾌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솔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솔직하지요.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이 글의 끝을 대체 어떻게 맺어야할까요? 그래요. 많은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전 그럼에도 잭슨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이 블로그의 제목을 보면 모르겠어요? 비록 초기영화의 그 무시무시한 장난기를 느낄 수는 없어도 그는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를 성실하게 생산해내니까요. 전 지금 그의 다음작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게 웬만하면 호러영화였다면 좋겠다는 희망은 품고 있지만요.

by 이녘 | 2006/03/06 11:39 | For horror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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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rborDay at 2006/03/06 11:50
오. 첫글부터 죽이게 공감가는 글이네요.
사실 피터잭슨은 공포전사가 아닙니다. 단지 나쁜, 혹은 막가는 취향을 가진 분이지요. 그는 "고어이면 고어일수록 더 낫다."라는 말을 밥먹듯이 하던 사람이에요. 심지어 천상의피조물들에서는 "오손웰즈는 쓰레기야."라는 대사도 내뱉아대죠.

그는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실력가입니다. 게다가 하나같이 센스를 가지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고무인간의 최후는 SF였고, 밋더피블즈는 잔혹인형극이었어요. 순수한 공포영화는 데드얼라이브 하나였지만 그것도 사실 어머니를 벗어나는 성장영화라고 할 수 있구요. 헤븐스크리쳐스는 그냥 드라마에요. 프라이트너는 코미디구요.(그러면서도 필요할때는 긴장감을 자아내죠).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에요.(그러면서도 말들이 내는 소리는 섬찟하게도 만들어대죠)

물론 호러매니아로서는 그의 새 작품이 공포영화이길 바라고 싶지만, 너무 멀리 간듯 보입니다.
Commented by 주시자 at 2006/04/24 16:19
처음으로 접한 영화 그리고 시작한 영화가 호러였다지만 이후 그가 만들어낸 천상의 피조물이나 반지나 킹콩등을 본다면 저는 아직까지도 피터 잭슨이란 인물이 가진 재능은 무궁무진하질꺼란 기대를 가지고있습니다(반지 이후 좀비를 만들고싶다고할땐 만세를 불렀다가 킹콩이 나온후엔 조금은 실망한 저도 있지만요 ^^)그래서 이후에 피터 잭슨이 이전에 손대지않았던 더욱 다양한 장르로나아가며 자신의 역량과 자신만이 만들수있는 영화를 더더욱 많이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있지요
사족... 그나저나 실리에님은 어떤 취향이길래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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