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찬 감독의 <청연>

 

 

오랜만에 비디오 가게에 들르니, 이 영화가 나와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왕의 남자>가 천만관객의 흥행을 이어나가는 동안, <청연>은 서두른 비행을 끝내고 그 자리에 도착한 것이지요. 박경원의 삶에 비하면 퍽 쓸쓸한 결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저는 정말 <청연>을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습니다. 윤종찬 감독의 <소름>을 정말 재미있게 보았었거든요. 그 작품에서의 장진영도 굉장히 좋았구요. 거기에 개봉 전 공개되었던 영상들도 훌륭했어요. 몇몇가지, 항거할 수 없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랬었더라면, 이렇게 비디오 가게에서 초라한 대면을 하는 일이 없었겠지요.

하지만 거기까지에요. 이 영화는 퍽 심심한 영화입니다. 역사적으로 민감한 시대를 다루는 이야기의 숙명이겠지만, 이 영화는 인물 자체가 가진 몇몇 흥미로운 위험들과, 일종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자 하는 균형의식 사이의 긴장으로 가득합니다. 문제는 그 긴장이 긴밀하게 유지되지 못하고, 그저 박경원이 간 걸음만큼 반대쪽으로 당기려고만 한다는 것이지요. 이 영화는 박경원에게서 우호적인 시선을 거두지 못합니다. 영화속의 그녀는 너무 곧은 인물이에요. 그녀의 비행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전적으로 그녀 외부에 있습니다. 그녀는 그저 순수하게 하늘이 날고 싶을 뿐이고, 그러한 그녀와는 무관하게 세상이 험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 단순한 열정만으로 경원은 살아갑니다. 고뇌하고 타협해주는 것은 그 옆의 좋은 친구들이 해주지요. 참 편한 삶이에요. 이 영화가 심심한 이유는 그것입니다. 그녀에게는 너무 죄가 없어요. 이상이 그랬던가요? 사람에게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구요. 저는 이렇게 바꿔 말해보겠습니다. 사람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입니다. 죄 없는 사람에게 무슨 고뇌가 있을 것이며 그러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재미있는걸까요? 물론 박경원은 자신을 구경거리로 만들기 위해 살아간 것이 아니지만요.

제가 감독에게서 거둘 수 없는 의심은, 그가 너무 친일논쟁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그가 진짜 표현하고 싶었던 것과 그가 피해가고 싶어했던 것 사이에서 중심 없이 표류합니다. 그는 가능한 많은 알리바이를 박경원에게 주고 싶어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알리바이야말로 영화를 심심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영화를 본다는 것은 역사 교과서를 읽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니까요. 저는 차라리 이 영화가 화끈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를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더 격한 논쟁에 휘말렸었겠지만 더 좋은 영화가 만들어졌을거에요. 그리고 더 많은 관객이 들어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마지막 것은 저도 좀 자신이 없네요.

하지만 그랬더라면 영화는 훨씬 현실적이고 그럴듯해졌을 것입니다. 아마 영화에서 ‘기베’에게 주어졌던 역할은, 기실 경원 본인의 속성일 것입니다. 그녀는 적절히 자신을 포장하고 광고하고 팔았을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권력가와의 관계도 맺어야겠지요. 그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비행기라면요. 게다가 당시에 ‘친일’이라는 것은 지금처럼 논쟁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거에요. 1930년대의 사람들은 대동아공영권을 믿었을 것입니다. 2000년대의 사람들이 미국을 믿는 것처럼요. 특히 경원처럼 문명의 오지에서 출발한 사람에게, 더 선진한 새로운 ‘조국’이 주는 선물, 바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던지는 인간 박경원을 상상해봅니다. 비행을 위해서 자신을 전시하고 판매하고, 그렇게라도 하늘을 날고 싶은 박경원을요. 그녀에게 정치적인 양심이 있다면 드라마는 더 흥미로워 지겠지요. 그 양심을 애써 묻고 비행을 택하는 박경원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글쎄, 악취미이려나요.  


그녀의 비행은 등반가가 고산을 등정하고 모험가가 극점을 순례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충동입니다. 거기에 산이 있고, 그저 오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전기가 심심해지는 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그 충동의 의미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극지탐험가나 등반가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초인’의 신화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은 곳을, 인간의 초연한 의지로 관통해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미지 같은거요. 하지만 경원에게는 그것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원의 하늘에 대한 욕망이 근거없이 붕 뜨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드라마가 약해지구요. 그래서 저는 경원에게 주어질 수 있었던 몇몇 동기들을 상상해봅니다. 우선 비행은, 세계의 오지였던 조선에게 근대문명의 찬란한 날개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신여성이었던 박경원에게 그 날개는 너무 하얗게 빛나는 존재였을 거에요. 그것은 사회적 약자의, 돌파의 욕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성공에는 수많은 장애가 존재합니다. 우선 식민지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점. 이 두가지만으로 그녀는 대부분의 장애를 얻었으니까요. 그것을 극복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박경원의 모습은 충분히 개연성 있지 않나요?

<청연>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입니다. 한발자국만 더 내딛었다면 정말 좋은 영화가 되었을거에요. 하지만, 많은 영화들이 그 한발자국을 못 내밀어 범작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리고 그 한발자국은 애초에 제작단계에서 원치 않은 방향이었을 것입니다. 거대자본이 들어간 영화는 늘 안전을 원하니까요. 결론을 말하자면- 실은 이것은 갑작스러운 결론인 셈인데- 이 영화의 흥행실패는 인터넷에 떠돈 그 무수한 친일논쟁 때문은 아닙니다. 반미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성적을 내었던 <007 어나더데이>를 생각해보세요. 여론은 늘 논쟁을 만들어내지만 그 논쟁이 흥행에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결정적인 원인은 되지 않아요. 이 영화의 흥행실패는, 그 특유의 안전한 심심함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좀더 논쟁적인 영화였다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됩니다.

 

by 이녘 | 2006/03/19 10:40 | For movie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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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윤보영 at 2007/11/18 04:19
잘 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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