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3월 31일
<오로라 공주>

저는 엄정화라는 배우를 좋아합니다. 그녀가 연기하는 여성들은 성격은 대개 야무지고 단단하며 예쁘고, 결정적으로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지요. 그녀의 실제 성격도 저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것 같아요. 그녀는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고, 다재다능합니다. 그녀가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 보여주었던 연기는 굉장히 능숙한 것들이었어요. 그녀의 노래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엄정화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무언가에 도전했던 적이 결코 없었지만, 언제나 자신의 몫을 해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재능과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고 그 한계 또한 잘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저는 그녀의 그런 프로페셔널한 이미지를 좋아합니다.
<오로라 공주>는 그녀의 첫 솔로영화입니다. 배우 출신 감독 방은진의 첫 연출작이기도 하구요. 저는 스릴러라는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 영화를 보게됩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상당히 훌륭합니다. 엄정화는 여전히 자신의 캐릭터를 잘 연주하고 있고, 방은진은 신인감독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줍니다. 굉장한 카메라워크나 서사의 변주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살인사건을 다루는 스릴러영화로서 할 것은 다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모범생 영화에요. 해야할 것은 다 하고 있지만, 한발자국을 더 내딛으려는 의지가 보이는 영화는 아닙니다. 가령 정순정의 살인장면들을 보세요. 스릴러 영화에서의 살인장면이 그렇게 심심할 수가 있다니요? 정서적인 충격을 주는 장면은 처음 백화점에서의 살인 정도일 것입니다. 이 영화는, 살인사건이 주는 쾌감이 극도로 제한되어있습니다. 방은진이 너무 수줍었던 것인지 아니면 능력 바깥이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살인'장면에서 꼭 피가 튀고 살점이 찢어져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처단되는 피해자들의 공포나, 혼란, 정순정의 복수심같은것이 엉키는 카오스는 충분히 보여줄 수 있고 사실 보여줘야 했지요. 하지만 이 영화의 복수는 너무 깔끔합니다. 마치 엄정화의 페르조나 처럼요.
정순정은 완벽히 자신을 통제하는 인물입니다. 복수를 위해 1년동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원수를 대하며 살아왔지요. 그래서일까요? 그녀가 감정을 터뜨리는 장면들은 조금 어색합니다. 조금더 불쾌하게, 조금더 혼란스럽게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을텐데 '분노'하는 장면들도 너무 깔끔하거나, 혹은 너무 실감이 나지 않아요. 방은진이 엄정화의 이미지에 너무 안주했는지, 아니면 그 이상을 끌어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 둘 중 하나이겠지요. 오히려, 아주 깔끔한 복수담을 그렸다면 어땠을까요? 엄정화라는 배우의 화강암처럼 단단한 가면을 비추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훨씬 더 재미있고 끔찍해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방은진이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통해 유추해보건대... 아마도 역시 모범생 타입의 배우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엄정화처럼요. 어쨋거나 저는 그녀의 다음 영화소식을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모범생들이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 법이니까요.
덧. 이 영화의 베드신은 정말 의무방어전이라는 생각이 팍팍 들더군요.
# by | 2006/03/31 12:45 | For horror | 트랙백(1) | 덧글(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제목 : 오로라공주
범인을 미리 알려주었기에 영화는 수사의 세밀함도, 범인에 대한 머리싸움도 아닌 범행의 동기와 복수의 일관성만을 그 핵심으로 합니다. 덕분에 형사들의 연기력은 있으나마나 한 수준으로 전락해버리기는 했지만, 엄정화의 후반부 연기력에 의해 충분히 보상되고 남는 것 같습니다. 같은 해에 나온 여성의 복수극(그것도 딸과 관련된)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친절한 금자씨'와 비교되기 쉬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재미나, 여배우의 연기력,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