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수, <바람난 가족>

 
한동안 <바람난 가족>은 제 영화 리스트 중 가장 위쪽에 놓여있었습니다. 영화 취향이 한참 바뀌어 버린 지금도 <바람난 가족>이 저에게 주는 쾌감은 그리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어쨋거나 이 영화는 2003년 최고의 영화라 할만해요. 최고의 임상수 영화이기도 합니다.

<바람난 가족>은 매우 정치적인 영화입니다. 매우 윤리적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어떤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충동으로 가득해요. <바람난 가족>의 인물들은 독특한 인물이기보다는 어떤 캐리커쳐들입니다. 그들은 각각 위선적 부르주아, 욕망에 솔직한 현대인이라는 요소를 나눠가지고 있어요.

모든 것을 잃은 호정이 고등학생과 섹스를 하며 어떤 구원을 얻는 장면에 이르면, 이 영화는 지나치게 윤리적이라는 의심을 벗기 힘들어집니다. 섹스를 통해, 삶과 욕망을 구원하고 되살린다는 식의 이야기는, 너무 흔하고 낡았습니다. 하지만 흐느끼며 섹스를 하는 문소리의 연기가 주는 파토스는 분명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화가 나타내는 주제의 '낡음'과는 상관없는 에너지를 생성시켜요.
임상수의 노련함도 한몫합니다. 임상수는 쿨함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지만, 자신이 애쓰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 숨기려 들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 쿨함에 온갖 정치적인 은유를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영작의 변호사라는 직업, 호정의 임신 등은 그러한 알리바이들이지요. 그것은 분명 튈 정도로 노골적이지만 눈에 거슬리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봐도 이 영화는 풍요로운 메시지로 가득해요. 사실, 그러한 정치적 서브텍스트를 깔고 봐야 더 재미있어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임상수는 사회적인 담론을 개인의 삶으로 환원시키는 영화를 찍어왔습니다. 물론 그가 표현하는 삶이란 언제나 자연적인 것이기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하게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눈물>에서의 그 익숙하기 짝이 없는 불량청소년들이며 <그때 그 사람들>의 정치인의 캐리커쳐 따위가 그러한 것들이지요. 그는 이미 표현된 인물들을 따와서 적당히 다른 목소리를 집어넣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데, <눈물>처럼 이미 표현된 것들에 함몰되어 임상수가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고, <그때 그 사람들>처럼 다른 목소리에 함몰되어 '이미 표현된 것'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요. <바람난 가족>은 딱 중간에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인물과 이야기의 스테레오타입과 그것을 가공하는 감독의 재주는 정말 적당한 배합을 만들어내요. 그 결과 이 노골적인 영화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낡음'은 어떤 진정성 비슷한 것을 획득하게 됩니다. 한동안 저는 이 영화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사실, 그것은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필요성이 증대되고, 사람들이 점점 그 필요성을 주장함에 따라 점점 더 작위적이 되는 어떤 슬로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진부한 이야기가 재미있다면, 한번쯤 더 듣는게 뭐 큰 고생이겠어요? 이 진부한, 임상수의 영화들을 제가 즐기는 것은 대체로 그런 이유입니다.


이글루스 가든 - 내맘대로 영화해석

by 이녘 | 2006/04/26 12:14 | For movie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damul83.egloos.com/tb/186998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