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미녀

 
얼굴없는 미녀를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로메로의 <발데마르 씨에게 생긴 일>이었습니다. 주제나 스타일에서 공통점을 찾아볼 수야 없지만 최면에 걸린 채 죽은 사람이 최면술사에게 돌아온다는 설정은 유사하니까요.

뭐,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얼굴없는 미녀>가 로메로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좀비영화의 변종이었던 <발데마르씨에게 생긴 일>과는 다르게 <얼굴없는 미녀>는 호러영화로 볼 만한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이 영화는 대체로 로맨스 영화입니다. 아주 병적인 로맨스 영화이지요. 정신과 의사와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라는 남녀설정부터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요? 이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역전이를 시작한 정신과 의사의 몰락을 그립니다. 정신과 의사에게 해당되는 모든 충고 -"사적으로 환자와 만나지 말라"를 어긴데 대한 징벌인 셈이지요. 이 구도는 거의 비극적이기 까지 합니다.

이 영화는 많은 아이디어와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과정은 환자와 의사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파워게임이지요. 적합한 예는 아니지만 <양들의 침묵>에서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 사이에 흐르던 긴장은 얼마나 짜릿했나요. 하지만 아이디어에서 충분한 쾌감을 뽑아내기에, 이 영화는 너무 산만합니다. 시나리오도 너무 굴곡이 없고 인물들은 심심하지요.

김태우는 늘 그래왔듯 내성적이고 상처받기 쉬워보이는 남자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어요. 그 때문인지 그가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들은, 정말 대책없어 보입니다. 아무런 비전없이 그냥 툭툭 말만 받아주는 느낌이에요. 전문가라는 느낌이 안살죠. 실제로 각본도 좋지 않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그 따위 얘기나 하고 있다니. 돈은 060 서비스 못지 않게 받으면서 말이에요!

김혜수의 연기는. 글쎄요. 헤어스타일은 제법 어울렸지만,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들은 영 어색했습니다. "저 감정연기를 하고 있어요!" 하고 외치는 듯 했어요. 또박또박 씹어내듯 대사를 내뱉는 밀회장면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죠.
한가지 악담을 허용하자면, 이 영화에서 김혜수의 몫이라는 것은 억지스러운 섹스를 하며 그동안 꼭꼭 가려온 가슴을 노출시키는 거였습니다. 듣던대로 그녀의 가슴은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가슴을 보려고 영화를 보는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그 베드신들은 그렇게 예쁜 편도 아니었단 말예요.

그래도, 마지막 지수가 반쪽의 얼굴로 찾아오는 장면이나, 소리나는 계단의 트릭은 좋았습니다. 첫 장면에서 떠오르는 물건들 가운데 앉아있는 지수의 모습도 괜찮았구요.

by 이녘 | 2006/05/24 21:14 | For horror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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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블로그 at 2006/05/24 22:20

제목 : 얼굴없는 미녀
얼굴없는 미녀. 과연 이 제목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굉장히 오래동안 생각을 하며 영화를 봤다. 실체없는 존재. 그리고 인간의 덧없을 욕망을 형상화한 것. 이 영화는 무척이나 도회적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골에서 돈이 없으면 더 비참해. 서울에선 옆집 누군가가 굶어죽어도 모르지. 그런데 시골에서는 어느 놈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다 알거든. 그래서 말이지. 없는 놈은 더 무시 받는다고."......more

Commented by yeah at 2006/05/24 21:18
소리나는 계단이 좀더 영화속에서 의미가 부여되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굉장히 많이 남습니다. ^^
Commented by tomstrong at 2006/05/24 22:01
'얼굴없는 미녀'는 아주 오래전 지금은 없어진 TBC에서 방송했던 드라마의 리메이크작입니다. 제목도 그대로이고요. 당시는 '이순재'씨와 '장미희'씨가 나와던 걸로 기억하네요. 달라진 설정이라면 남자의 직업이 아마 화가였을 겁니다. 저도 어려서 봤는데, 아주 무서웠던 기억이...장미희씨가 마지막엔 얼굴이 반쯤 썩은 상태로 산골마을에 숨어있는 남자를 찾아오는 장면이...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05/24 22:20
김혜수는 참 연기를 잘 하는 배우임에도, 연기보다는 다른 것이 돋보이는 어떤 의미에서 운없는 배우인지도 모릅니다.
몇몇 장점도 눈에 띄지만, 많이 아쉬운 영화였어요.
Commented by 이녘 at 2006/05/24 22:53
yeah님/역시 그 부분은 참 좋았었죠? 아닌게 아니라 몇몇 이미지들은 참 좋은게 많았어요.

tomsrtrong님//음음. 이제야 기사들을 뒤져서 보았습니다. 솔깃한걸요. 지금은 자료가 소실되었다는데, 아쉽네요 ㅠㅜ

Arborday님// 저는 <신라의 달밤>에 나왔던 새침하면서도 당찬 이미지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최근 김혜수의 페르조나는 아무래도 호러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어울리는 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확실히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Commented by tomstrong at 2006/05/24 23:03
당시 TBC에선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상업적이고 획기적인 기획작들이 많았답니다. '정윤희'씨가 무인도에 사는 돈많고 창백한 청년(송승환)의 가정 교사로 간다는 드라마도 있었는데...아주 분위기가 싸아한 싸이코 물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재밌는게 참 많았는데 다 기억이 안나는군요. 하긴 지금 생각하면 그 드라마들도 당시 일본 것의 모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최근 자료를 보니 당시 그 무렵 일본에서 그런 류의 드라마 시리즈들이 전성기였다는 군요.
Commented by 이녘 at 2006/05/24 23:14
tomstrong님// 그거 정말 솔깃한걸요! 저도 지금 드라마들을 열심히 보아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네요. 혹시 알아요. 먼 미래의 드라마에서는 피 한방울만 흘러도 시청자 항의가 빗발치고 키스신이 나오면 아이들 눈을 가리느라 급급하게 될지요. 흠흠. 여튼 시나리오 원본이라도 구할 수 있을 지 뒤져봐야겠어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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