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7월 15일
여자, 정혜

이 영화를 왜 이리 늦게 보았을까요. 우선 아름답고 차분하며, 감동적이라는 두리뭉실한 영화평들이 제 마음에 안들었기 때문일거에요. 전 향이 강한 영화를 좋아합니다. 다소 거칠어도 스타일이 뚜렷한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그러한 저에게, 이 영화를 보았다는 감상들은 하나같이 조금씩 싱거워보였어요.
실제로는 어떨까요? <여자, 정혜>는 향신료가 가득 쳐진 독한 맛을 내지는 않지만, 나름의 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향은 입 안을 가득 맴돌지 못하고 곧 사라지고 말지만요.
이 영화는, 제가 들었던 설명 그대로입니다. 아름답고 차분하며 감동적이에요. 이 느릿느릿한 영화가 조금씩 조금씩 감질나게 보여주는 '정혜'라는 여자의 일상은, 그러나 심심하지 않습니다. 베란다 가득 화분을 키우고, 길가의 고양이를 주워다 기르며, 알람시계를 몇개씩이나 갖추고 있고, 매일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직장에서는 실수 하나 저지를 것 같지 않은 여자. 평범한 30대 미혼여성의 일상처럼 보이는 이러한 묘사들은, 그러나 겹쳐지면 겹쳐질수록 묘한 텁텁함을 만들어냅니다. 카메라가 묘사하는 정혜의 모습은, 마치 그녀의 고양이의 모습과 비슷하거든요. 낯선 곳에서, 절대 자신의 영역 바깥으로는 나가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요. 그녀는 자신의 공간 안에서 필요 이상으로 꼼꼼하며, 많은 규칙들을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그 경계선을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도식적이라면 도식적인 묘사이지만 차분하게 거리를 둔 카메라가 단속적으로 잡아내는 장면들은 꽤 재미있는 입체를 만들어내요. 별 굴곡없는 진행이지만, 일관성있는 숨은그림찾기같은 느낌의 화면을 바라보는 재미도 상당합니다. 그것은 액션영화를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상상력을 요구하는 과정이에요.
정혜가 신혼여행 첫날밤 도망쳐버렸다는 과거나, 구두가게에서의 에피소드에 이르면, 이 조용해 보이는 아가씨가 단순히 조미료 덜 처진 음식처럼 심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뭔가 꽉 억눌려 있는데 그것을 해소하지 못해 점점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하는 현대인의 모습이죠. 우리는 정혜의 고독과 심심한 일상이 결코 안정적이지 않고 언제라도 터져버릴 수 있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라는 것을 알게되요.
고모부에게 강간당했던 과거가 드러나고 나자, 이 모든 이야기들은 정혜라는 여성의 자아회복에 관한 메타포로 바뀌게 됩니다. 우체국 남자와의 조심스러우면서도 소심한 연애의 불발과, 술 취한 남자와의 기묘한 하룻밤, 그에게서 얻어낸 잭나이프로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찾아가는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처음처럼 느긋한 심정으로 정혜를 지켜볼 수 없게되요.
영화의 결말은 뜻밖에 쿨합니다. 사실 당연하기도 하죠. 지금까지 끌어온 리듬으로는, 사람을 죽일만큼 감정을 폭발시키는 정혜를 상상하기 힘들거든요. 정혜는 고모부를 죽이지 못하고, 준비했던 칼에 자기 손을 베게 되요.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흘리지 않던 눈물을 흘리며, 정혜는 웁니다. 우리는 정혜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그를 용서한 것인지, 아니면 용기가 없었던 것인지 전혀 눈치챌 수 없어요. 우리는 정혜처럼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감정의 한가운데에 던져지게 됩니다.
이 영화는 대체로 따뜻합니다. 반려동물을 기르고 새로운 남자에게 넌지시 마음을 전할 만큼 정혜는 고통스러운 자기폐쇄에서 벗어났으며, 마지막의 결말은 행복한 정혜의 미래를 어느정도 암시하는 것도 같아요. 이러한 시선들이 이 영화의 매력을 형성하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저로서는 조금 불만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정혜라는 인간을 만들어가는 세밀한 테크닉에 비해, 그녀에게 주어진 비극은 뜻밖에 흔한 것이고 그 해결책도 너무 흔하기 때문이지요. 일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 운운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했다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을 것 같습니다.
# by | 2006/07/15 23:48 | For movie | 트랙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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