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7월 24일
왕의 남자

이제야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때를 놓쳤기 때문에 영영 보지 않을까도 생각했었는데. 대종상을 휩쓴 <왕의 남자> 소식에 슬쩍 낚여버렸달까요. 또한 동성애 코드의 영화였다는 점에 끌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저는 이런 주제를 관심있게 찾아보기 시작했으니까요.
가끔은 숫자가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저는 <왕의 남자>가 2005년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왕의 남자>보다 더 나은 성취를 보여주고도, 저평가된 좋은 영화들이 얼마든지 있답니다. 좋은 영화의 기준은 관객 숫자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1200만이라는 숫자는 어떤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왕의 남자>는 좋은 영화에서 의미있는 영화의 영역으로 초월해버려요. 이 영화의 디테일에 관한 어떤 반론도, 저 어마어마한 숫자는 덮어버립니다.
영화는 이준익의 전작인 <황산벌>과 여러모로 비슷합니다. 결코 어떤 테크닉을 과시하지는 않지만, 가끔 힘이 있는 장면도 나오지요. 인물은 설득력이 없고 피상적이지만,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거의 방백처럼 주제를 전달하는 이 낡고도 진부한 기교도, 가끔 재미있게 표현되지요. <왕의 남자>는 완숙한 테크닉을 과시하는 거장의 영화가 아닙니다. 거칠지만 아이디어로 넘치는 젊은 감성의 영화도, 물론 아니에요. <왕의 남자>는 그냥 흥미롭고도 조심스러운 오락영화입니다. 이준익 특유의 입담과 휴머니즘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그의 개성은 영화 밖으로 넘칠만큼 강한 것이 아니에요. 심지어 이 영화는, 이 산만한 에피소드들을 하나로 엮을만한 응집력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장생의 의지와 공길의 동정심, 녹수의 욕망과 연산군의 상처가 <왕의 남자>안에서 도가니탕처럼 섞여 있어요.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한 색깔로 산뜻하게 섞이는 것은 아닙니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연산군이 광대패들에게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은 공길에 대한 애정으로 수렴되어버리지요. 이것은 영화의 주제가 풍요로워질 수 있었던 몇몇 가능성을 차단해버립니다. 공길의 연산에 대한 마음은 도저히 공감이 가지 않으며, 강한 에너지를 보여주었던 녹수는 너무 홀대받고 있습니다. 정진영이 연기한 연산의 모습은, 흥미롭지만 너무 연극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준익의 영화문법이 그 가능성을 살려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정적으로, 영화의 두 축인 장생과 연산이 너무 겉돕니다. 이 둘은, 직접적으로 감정을 교류할 기회도 몇 번 없어요. 장생의 세계의 자유와 연산의 세계의 아픔이라는 대조는, 그 사이에 공길이 끼어들며 더 엉망진창이 되어버립니다. 두 세계는 진정한 대립을 경험하지 못하고, 질투라는 대리전을 벌이게 되요. 차라리 장생과 공길, 둘 중 하나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훨씬 밀도있고 강렬한 주제를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공길이 없었다면 장생과 연산의 대립에 의해 이준익 특유의 정치적 공정성에 관한 욕망과 휴머니즘이 범벅된 드라마 하나가 나왔겠고, 공길과 연산의 구도에서는 게이 로맨스 하나가 뽑혀 나왔겠군요. 녹수의 캐릭터도 훨씬 많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겠구요.
하지만 그렇게 밀도있는 영화가 1200만을 불러모을 수 있었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더 재밌는 영화가 나왔는지도, 저는 장담할 수 없어요. 이준익처럼 순진한 휴머니스트가, 밀도있는 각본을 만들기 시작하면 답답한 모양새가 나올 것 같단 말이지요.
결론적으로, 이준익은 줄다리기를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건전한 정치의식과 소박한 휴머니즘은, 조심스럽고 다소 산만한 스타일 속에서 안전한 영화를 만들어냅니다. 딱히 <황산벌>이나 <왕의 남자>가 <실미도>나 <공공의 적>보다 덜 정치적인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위험한 영화는 아니에요. 이준익의 시선은 소심해보일만치 소박하지만, 그것이 또 꽤 먹히니까요. 거기에, 강우석처럼 위험한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고...
# by | 2006/07/24 00:08 | For movi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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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고 제 친구들도 그렇고 그냥 뜬 소문만 듣고 우루루 극장으로 향한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191970님// 제가 너무 기대를 하고 봐서 그런걸까요. 1200만이라는 호들갑을 잊어버리면 그럭저럭 볼만한 영화였던것 같네요.
lovepool님. 그래도 그 입담이 가끔 좋았어요. 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