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8월 12일
로리타

언젠가 저는 큐브릭의 각색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큐브릭이 자신의 오리지널 각본으로 만든 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제가 본 큐브릭의 영화들은 거의 다 떳떳한 원작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입니다. 그러니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오렌지>나 <샤이닝>, 원작을 보지 못했지만 <아이즈 와이드 셧>과 같은 작품들이지요.(아. 풀 메탈 자켓의 각본은 오리지널인가요? 잘 모르겠네요) 큐브릭의 각색은 상당히 흥미로운 편인데, 이 사람은 원작의 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원작과는 미묘하게 다른 생소한 분위기를 들이밉니다. 이 사람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원작과는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어내요. 제가 느끼고 있는 큐브릭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그 악취미적인 비틀기입니다.
<로리타>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큐브릭은 예상을 많이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는 큐브릭스러움이라 부를 수 있는 분위기가 철철 넘쳐 흐르고 있어요. 각색 작업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참가했건 하지 않았건, 이 영화에는 원작자보다 큐브릭의 입김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오프닝에서부터 살펴볼까요? 원작에는 나오지 않았던, 이 매니큐어를 발라주는 장면은 오히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그려낸 <롤리타>의 세계보다 훨씬 더 롤리타적입니다. 소녀의 발과, 그것을 잡고 매니큐어를 발라주고 있는 어른의 손. 섬세한 터치와 중간중간 발가락 사이에 끼워주는 약솜.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온갖 페티시즘 장면 중에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에로틱 했습니다. 페티시즘적이고 관음증적인, 시각적 자위행위에 가까운 이 영상은 큐브릭이 마음먹고 건낸 짖궂은 농담처럼 보여요. 큐브릭은 시치미를 뚝 떼고 다시는 이런 이미지를 활용하지 않습니다. 더 예쁘고 탐미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던 장면에서도, 큐브릭은 대체로 냉정과 냉소를 유지하고 있어요. 이것은 나보코프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나보코프가 그려낸 험버트는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굳이 통제하려 들지 않는 위험한 남자입니다. 비록 롤리타의 악마적인 매력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그 욕망의 주도권을 잃어가지만, 그래도 나보코프의 세계에서, 험버트의 파멸은 어느정도 험버트의 것이에요. 롤리타의 악마성과는 상관없이, 롤리타는 험버트의 욕망의 대상입니다. 비록 롤리타와 험버트는 섹스를 하지만,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에는 꼭 롤리타가 있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험버트는 이야기 내내 거의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어요. 그는 심지어 롤리타와 관계할 때보다, 롤리타를 재우고 바라보고 있을 때 더 큰 만족을 느낍니다.
하지만 큐브릭의 이야기 속에서, 험버트는 우연히 롤리타라는 악마에게 빠져든 소심하고 어리석은 남자에 불과해요. 험버트라는 사람의 정신적 결함이 가지고 있었던 원래의 파괴적인 에너지는 다 사라지고, 나약하고 옹졸하기 짝이 없는 추잡한 늙은이가 나타납니다. 물론, 원작에 없던 에피소드를 추가하거나 하는 식으로 인물의 성격묘사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미묘한 해석의 변주, 시나리오의 배치, 의도적인 설정의 삭제 등으로, 험버트라는 남자의 초상은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서서히 큐브릭의 세계가 나타나요.
퀼티 같은 남자를 보세요. 그 사람은 원작에서 악역으로서 받아야할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는 온갖 수수께끼를 쏟아내며 험버트를 정신적 함몰로 몰아 넣어요. 처음 시퀀스에서, 그가 쏟아내던 그 산만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온갖 수다들은 얼마나 큐브릭적인지. 나보코프의 실재 대사가 얼마나 쓰였는지와는 상관없이, 살인자를 앞에 두고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퀼티의 모습은 큐브릭의 인물, 바로 그대로 였습니다.
큐브릭의 영화와, 원작들을 번갈아 보고 있다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재치있는 독자이고 각색가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원작을 가만두지 않아요. 그는 읽어내고, 해석하고, 다시 씁니다. 그렇게 다시 만들어진 작품들은, 오리지널의 단순한 번안작이 아니라, 아예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성격의 어떤 것이 되어버립니다. 큐브릭의 영화들이 수많은 인문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에는, 그가 영화를 통해 생산적인 독서를 하고 있다는 이유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로리타>는 큐브릭의 로리타 였습니다. 이 사람의 영화를 볼 때면, 늘 원작을 함께 읽어보는 편이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물론 큐브릭이 원작을 어떻게 변주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분명한 감상포인트이기는 하지만. 큐브릭의 세계는 그 스스로 충분한 매력과 자기완결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덧. 이제 <배리 린든>과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만 보면, 제가 보고 싶어했던 큐브릭 영화는 다 보는 셈입니다.
덧둘. 이미지 구하기가 왜 이리 힘든지... DVD 이미지를 떠왔습니다. 으음-_- 포스터 이미지 가지신 분 있으면 살짝 알려주세요.
# by | 2006/08/12 18:38 | For movi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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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이미지는 http://www.allposters.com/ 에서, 검색창에 lolita를 치면 몇 개 나옵니다. dvd커버와 거의 다르지 않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