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몬스터

 



어쩌면, 오늘 저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CUT>을 감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코멘트도 들을 수 있었겠지요. 사실, 물어볼 것들이 생각나지는 않지만요. 그저께 저에게 주어진 이벤트 티켓이 딱 두-_-장만 되었어도 저는 박찬욱을 보러갔을거에요. 예. 가지 않았답니다. 대신 늦은 저녁,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쓰리, 몬스터>를 빌려와서 막 다시 보았습니다. 재미있네요ㅠㅜ

<CUT>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박찬욱 영화입니다. 박찬욱 같이 과잉한 정서와 이미지를 다루는 감독의 영화를 두시간 넘게 감상한다는 것은, 때로는 지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로해요. 이 경우 짧다는 것은 미덕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의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이 불쾌함의 폭풍은, 그러나 여러모로 짜임새 있고 날씬합니다. 또 알차요. <CUT>이 전달하는 혐오감의 부피는 결코 <복수는 나의 것>이나 <올드보이>에 뒤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치지 않고도 박찬욱의 세계를 오롯하게 감상할 수 있는거죠.

<CUT>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요? 유지호는 잘나가는 영화감독입니다. 젊고, 잘생겼고, 천재감독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예쁜 아내와 살고 있어요. 거기에 그는 인격자이기까지 합니다! 오랫동안 그의 엑스트라로 일해왔던 임원희는 이것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세상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은, 착하기까지 해서 죽은 뒤에서 천국에 갈 텐데. 세상 무엇 하나 받아본 것이 없는 자신은, 죽어서도 지옥에 갈거라는 거죠. 임원희는 이병헌의 부인인 최미란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잘라가며, 자신의 아들을 죽여 죄를 지을 것을 요구합니다. 임원희 특유의 진지한 장난기와 충청도 사투리, 슬랩스틱 코미디가 범벅된 분위기 속에서, 이 잔혹한 상황은 이병헌을 몰아세우고, 단란하고 안전해 보이던 감독의 세계는 점점 깨어져나가기 시작합니다.

<CUT>에서 가장 끔찍했던 장면은 장난기 가득한 두차례의 흡혈장면이나, 손가락 육즙 만들기 같은 박찬욱 특유의 사지절단이 아닙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재능없는 예술가의 가치에 대해 말하는 이병헌의 모습은, 정말이지 섬뜩했어요. 강혜정의 얼굴을 잘라붙여 만든 애니메이션도 어마어마하게 불쾌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인간을 혐오할 때 가장 빛이나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니깐요. 거 참. 뭐, 그래서 좋아하는 감독이긴 하지만요.

<BOX>는 <착신아리>의 미이케 다케시의 작품입니다. 원래는 잔혹한 사지절단으로 유명한 감독이라고 하는데, 아직 그의 고어를 보지 못해서 별로 할 말이 없네요. 작품 자체는 몽환적인 일본풍의 괴담입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언니와 함께 유랑극단에서 자란 '쿄코'는 매일 비닐에 쌓여 땅에 묻히는 악몽을 꾸고 있습니다. 쿄코는 과거, 극단주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언니에 대한 질투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언니를 상자에 가두고, 여차저차 하다가 불에 태워 죽여버렸지요. 십수년이 흘러, 유명한 작가가 된 쿄코는 어느날 기이한 초대장을 받고 예전의 극단주와 자신의 언니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꿈이었대요. 샴쌍둥이인 쿄코가 꾼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악몽이었던거죠.

네. 이 간단한 줄거리 요약에서부터 눈치챘겠지만, 이 영화는 결코 가지런히 정리되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영화는 대체로 차분하고 몽환적이며 꽤 얌전해요. 박찬욱의 신경을 쥐어짜는 듯한 연출에 비하면, <BOX>는 어느 비 오는 오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털어놓는 나른한 괴담같은 느낌입니다.

마지막 프루트 챈의 <Dumplings>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인육만두에요. 우리나라에서는 인육자장면 정도로 퍼져있는 괴담이지요. <신장개업>을 기억하시나요? 우리나라 인육자장면의 주된 테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잔혹한 경쟁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손님을 끌기 위해 자장면에는 인육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Dumplings>의 세계에서, 인육을 먹는 이유는 바로 젊어지기 위해서입니다. 메이는 낙태아를 이용해 만두를 만들어 파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자입니다. 칭은 중년의 탤런트로 떠나간 남편의 사랑을 붙잡아보기 위해 회춘을 불러일으킨다는 인육만두를 먹기로 결심하지요. 영화는 시치미 뚝 떼고,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신선한 고기와 정말이지 맛있어 보이는 만두를 먹음직스럽게 보여주며 농담을 던집니다. 그 순간 혐오감과 아름다움은 하나가 되며 독특한 불쾌감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저는 그 때, 참 배가 고팠어요. 메이가 삼키는 만두는 정말이지 맛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에. 그 기분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칭은 메이가 자취를 감추자, 자신의 아이를 낙태시켜 그대로 집어 삼킵니다. 크리스토퍼 도일이 잡아낸 화면속의 칭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또 젊어 보이네요. 저는 이 영화가 '아름다움에 대한 현대인의 집착을 풍자하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영화는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인간에 대한 농담입니다. 그 농담은 꽤 불쾌하지만, 또 예쁘고, 먹음직스러워요.


<마스터스 오브 호러> 시리즈를 보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호러라는 장르는 1시간 내외의 짧은 분량이 의외로 생산적인 터전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불쾌감과 과잉한 정서를 총탄삼아 팔아대는 작가들이라면 더욱 더요. 우리나라 방송이 조금만 더 짖궂어진다면 좋을텐데요. 얌전하기 그지 없다는 코마의 소식을 들으면, 참 안타깝습니다.

by 이녘 | 2006/08/14 02:01 | For horror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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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rborDay at 2006/08/14 03:40
아이디어를 소진시키면 군더더기 없이 끝나버린다는 점에서 단편은 매력이 있습니다. 쓰잘데기 없이 끌어봐야 망가지기만 할 따름이죠. 코마는 솔직히 기대이하랍니다, 뭐 5편을 몰아보면 어떤 느낌이 들지 모르겠지만요.
개인적으로 '컷'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박찬욱의 영화이지만(이미지, 설정은 참 좋은데, 기교가 너무 앞서나가는 느낌 좋아하지 않아요), 가장 박찬욱다운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극명하게 갈리는 취향이 드러나버렸네요. 만두, 그 소리 하나는 멋지더군요. ^^
Commented by 戮屍 at 2006/08/14 14:23
BOX 봐야겠네요. 미이케 다케시는...점점 고어와는 멀어지는 것 같아서 슬픕니다.
Commented by 海月 at 2006/08/14 15:00
아..이거 정말 정신없이 봤었던 기억이 나네요. 임원희가 정말 다시 보이더군요. ^^
Commented by 이녘 at 2006/08/14 22:21
Arborday님. 오도독 오도독 씹어먹는 그 소리 말이죠.-_-ㅋ 빨갛게 속이 비치는 만두의 모습이 정말 일품이었답니다.

戮屍님. 으음....전 미이케 다케시의 고어를 보아야, 일단 슬퍼하겠는걸요. 피터 잭슨을 반지의 제왕부터 보는 것과 비슷하려나요. 이건.

海月님. 임원희, 확실히 좋았어요. 이런 블랙코미디에 어울리는 배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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