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

 




얼마전에 <플란다스의 개>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를 들었습니다. 영화 끝자락에 윤주가 강의를 하는 곳은 모 대학의 심리학과 강의실이랍니다. 봉감독은 심리학과야말로 미래가 없는 '50위 인문학도'의 표본이라 생각하여 그곳을 섭외했다는 거에요. 촬영하는 내내 봉감독은 진심이 담긴 동정어린 눈초리로 모 대학의 심리학도들에게 커피를 뽑아주었다고 합니다. 이거 먹고 힘내라구요. 그 씁쓸한 얘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이 영화의 리뷰가 쓰고 싶어졌습니다.

예.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큰 축은 바로 대한민국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무자비한 회의입니다. 주인공 윤주는 '대한민국에서 결혼하고 싶은 직업 50위에 랭크된 인문학과 대학원생' 입니다. 세상 사는 요령이 부족한 그는, 과 선배인 아내의 생활력에 기대어 살고 있는 백수나 다름없는 사람이에요. 가장의 권위는 커녕 남편으로서의 최소한의 지위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윤주는, 때 마침 약올리듯 컹컹 짖어대는 개들 때문에 미칠 지경입니다. 이 소심한 남자의 스트레스는 어느 순간 이 죄없고 약한 개에게로 향하기 시작해요. 예. 그리고 이러한 일탈행동은, 정의감 넘치는 아파트 관리소 직원 현남과의 한판 승부를 불러오게 됩니다. 여기에 죽어버린 개들을 가지고 보신탕을 끓여먹는 변수위와 오랫동안 아파트 밑에거 기거해온 행려자가 더해지며 이 드라마는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이 영화의 한 축이, 대한민국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무자비한 회의라고 했었죠. 또 다른 축은, 대한민국에서 배우지 못한 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동정입니다. 현남과 장미로 대표되는 저학력 여성의 삶은 꿈도 미래도 보이지 않습니다. 현남은 소시민 영웅을 꿈꾸며 힘껏 뛰어다니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실직 뿐이지요. 세상은 정의감만으로 살 수 없을 뿐더러 그녀가 품은 정의감은 아주 애매한 것입니다. 현남 특유의 순진한 온정은 이 각박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니까요. 이 회의와 동정이 하나로 뭉뚱그려지며 이 영화의 주제가 비치기 시작합니다. <플란다스의 개>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한탄이 가득한 영화입니다. 너무 배운 자도, 너무 배우지 못한 자에게도 이 나라는 너무 힘겹습니다. 이미 승부에서 져버린 초라한 사람들을 데려다놓고 벌이는 이 한판 난장은 서글프기 까지 합니다. 아예 속을 모르겠는 변수위를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는 도무지 미워할만한 캐릭터가 없어요.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윤주의 캐릭터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입니다. 광막하기까지한 무료함과 무력함을 경험한 자의식 강한 소심한 남자의 삶이란 충분히 힘겨워 보이거든요. 아슬아슬하게 버텨가고 있는 삶에 자신보다 약해보이는 불만거리가 나타났을 때 터져나오는 급작스러운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험 시절, 불면증에 시달려가며 발정난 동네 고양이들을 다 때려죽일 상상을 하던 저로서는 너무나 절실하게 이해가 됩니다.(__)

이 영화는 뒷맛이 아주 안 좋습니다. 나른하게 마무리를 짓고 있지만 결코 해피엔딩이라 할 수 없어요. 현남은 직장을 잃었고 윤주는 속악한 세상 속으로 편입해들어갔습니다. 나른한 악몽같은 뒷마무리에요.

봉준호 감독의 다음 작품인 <살인의 추억>은 화성살인사건이라는 소재에 눌려 봉준호식 리얼리즘이 얌전하게 따라가고 있었죠. 하지만 <플란다스의 개>는 한층 노골적입니다. 괴물도 퍽 노골적이었죠.  <플란다스의 개>와 <괴물>은 한 형제 같습니다. 너무 많이 회의한 지식인 출신 감독이 그려낸 영화같은 느낌이에요. 뭐, 저는 그게 상당히 좋았습니다.


덧.  문득 개를 학대하는 영화를 만들면, 사람을 학대하는 영화 이상으로 충격적일 것이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by 이녘 | 2006/08/23 18:07 | For movi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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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스카이워커 at 2006/08/23 18:38
미래가 없는 심리학....orz
그래서 제가 다시 전공과 하등 상관없는 이 공부를 시작했나봅니다?
보일라 김씨, 무말랭이.
Commented by 이녘 at 2006/08/23 19:00
마지막 한 줄이 뭔가 수수께끼같은 의미를 만들어내네요.
보일러 돈다잉~
Commented by 시네21 at 2006/08/25 22:27
이렇게도 볼수 있는 영화군요. 제 블로그로 담아 가고 싶은 글이네요 ^^
Commented by 이녘 at 2006/08/25 22:37
안녕하세요. 시네21님. 비밀스러운 분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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