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8월 24일
캐리

드디어 <캐리>를 보았습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만큼이나 브라이언 드 팔마의 출세작으로 유명한 작품이지요. 팔마의 영화를 많이 보지 않은 저로서는, 흥미로운 포인트 몇몇개를 놓쳤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뭐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는 스티븐 킹의 원작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는 예의바른 번안입니다. 이야기 자체도 얼마 훼손되지 않았고, 등장인물들의 성격도 거의 보존되었습니다. 결말 부분이 약간 수정되었고, 원작에서는 상당히 신경을 써서 이루어졌던 수와 크리스의 묘사가 상당히 제거되긴 했지만, 오히려 스티븐 킹의 수다스러운 이야기를 날카롭고 날씬하게 다듬은 느낌입니다. 이 영화의 시선은 캐리를 떠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첫 시작은, 역시나 강렬합니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샤워를 하는 캐리는 자신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깨닫고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에로틱과 서스펜스를 적절히 뒤섞는 팔마의 테크닉은 대단해요. 거의 관음증적이기 까지한 카메라가 캐리의 온 몸을 핥듯이 훑다가, 어느 순간 사타구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공포에 빠진 캐리의 얼굴, 울부짖음, 잔인한 군중들의 웃음. 카메라는 패닉에 빠진 캐리의 공포를 화면 밖으로 발사하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을 거치고 나면, 캐리가 비웃음 당한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큰 공포를 가질 수 밖에 없는지, 설득 당할 수 밖에 없어요.
브라이언 드 팔마와 스티븐 킹의 다른 점은 <캐리>를 끌어가는 방식입니다. 스티븐 킹의 이야기는, 언제나 인간적이에요. 스티븐 킹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인간에 의해 진행되는 드라마에요. 인물들에게 주어진 상황은 우발적이고 통제를 벗어난 것들이지만 그 안에서 각자의 의지와 힘으로 서로를 간섭해가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킹의 소설 속에서 한 인간의 성숙이나 의지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에서보다는 훨씬 중요한 지위를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수는 자신의 호의가 캐리를 파멸시킨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행동을 정확히 이해하고 용서합니다.
크리스나 빌리, 비교적 단역에 가까운 토미나 데스자딘 선생도 훨씬 중요한 배역을 가지고, 이야기에 나름대로 간섭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팔마의 영화 안에서 그들은 정말 단역일 뿐입니다. 캐리가 초능력을 사용해 모든 것을 파국으로 몰아넣기 위한 단역, 그 강렬한 이미지를 내뿜어주게 하기 위한 단역이에요.
영화 <캐리>는 소설 <캐리>가 가지고 있었던 많은 미덕들을 일부러 버리고 있습니다. 캐리의 이야기는, 캐리를 돕기 위한 모든 행동들이 결국 캐리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운명비극입니다. 여기에서 각각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었던 행위의 동기나 의지들은 마땅히 강조받을 권리가 있었지요. 하지만 브라이언 드 팔마는 그 모든것을 쳐내 버립니다. 남은 것은 캐리라는 사춘기 소녀가 경험하게 된, 일련의 끔찍한 동화같은 모험이에요. 캐리의 혼란이지요. 사춘기 소녀의 끔찍한 혼란과 공포, 분노, 수치심은 소설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감정이었지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속에선, 그게 거의 전부에요. 덕분에 스티븐 킹 고유의 인간적인 이야기의 미덕은 사라졌지만, 캐리라는 아이가 가지고 있는 혼돈은 원작보다도 더 원색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저는 소설속에서, 이렇게 강렬하게 캐리의 아픔을 느끼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두 작품의 결말은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원작에서의 캐리의 폭주는 지금까지 쌓여온 갈등과 폭력들이 한꺼번에 휩쓸리는 대청소 같았는데, 영화에서는 캐리가 초능력으로 이것저것 부수고 다니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원작에서는 마을 하나를 다 부숴버렸는데요. 대신 캐리는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마가렛과 최후의 담판을 짓게되죠. <캐리>의 이야기에 진실로 간섭하고 있는 인물들이 몇 안되기 때문에, 마지막 폭주가 주는 거대한 카오스와 카타르시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스티븐 킹과는 다른 식으로 결말을 맺어버리죠. 그래서.
여기까지 쓰고 보니 필요이상으로 과장한 느낌이 드네요. 두 사람의 차이에 대해 길게 서술하긴 했지만, 이 두 버젼의 <캐리>는 그렇게까지 사이나쁜 형제가 아니랍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스티븐 킹에게 있는 것이 브라이언 드 팔마에게 없고, 브라이언 드 팔마가 강조한 것이 스티븐 킹에게는 하잘 것 없는 것이었던 것은 아녜요.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습니다. 캐리의 표정이 너무 단조롭고, 특히 돼지피를 뒤집어 쓴 다음의 패닉을 묘사하는 것은 좀 심심하고 우스꽝스러웠지만, 그것은 영화속의 캐리가 제가 생각했던 캐리와는 조금 달라서였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몰라요. 저는 좀 더 뚱뚱하고 고집세보이는 덜 자란 숙녀를 상상했거든요. 영화속의 캐리는 볼륨 넘치는 미인이구요. 마가렛은 더 이상의 적역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 음침하고 신경질적인 연기는 제가 상상한 마가렛의 모습 그대로였어요. 빌리역으로 존 트라볼타를 보았을 때는, 마냥 웃었습니다. 이 아저씨가 캐리에 나왔을 줄은 몰랐었거든요. 크리스와 빌리도 제한된 장면 안에서 나름대로 자신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스티븐 킹의 캐릭터가 거의 보였으니까요. 수와 토미는...뭐. 데스자딘 선생까지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원작보다 훨씬 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었으니까요.
산만하게 썼더니 결론짓기가 어렵네요. 원작이 있는 영화들을 다룰 때는 늘 두 작품을 비교하는 식으로 글을 쓰게 됩니다. 뭐, 나쁘지 않지만 먼 훗날 이 글을 펼쳐보았을 때 영화를 보며 느꼈던 감정들을 되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조금 신경이 쓰입니다.
덧.
지금 알게 된건데, 이 DVD 버젼의 포스터에는 당당하게 존 트라볼타의 이름이 주인공으로 올라가 있네요. 거, 참-_-
덧둘. 海月님께 답글을 달다가 문득 생각나서 남깁니다. 우리나라였어봐요! 고등학생의(설정상) 나체가 나온다는 이유로 앞부분은 다 드러내고 크리스와 빌리의 장면도 사라졌을겁니다. 고교생의 오럴섹스를 어떻게 지켜보겠어요. 칫. 뿌연 처리가 안된 화면을 보니, 고맙기까지 하더군요.
# by | 2006/08/24 22:29 | For horror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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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캐리는 보면 볼수록 느낌이 나아지더군요.
돼지피를 뒤집어쓴 그녀의 표정은 두 말할 나위없이 베스트였죠.
戮屍님. 강렬하죠. 브라이언 드 팔마는 잘 모르지만, 심박수를 조종하는 마법같은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sputnik님. 마가렛이 나오는 장면은 거의 다 힘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포교하러 수지의 집에 갔던 장면이 좋았습니다.
Arborday님. 밸리에 이름이 뜨지 않으니, 조금 불편해요. 가끔 "이건 이 사람이겠구나" 싶은 제목도 몇몇개 있기는 합니다만...에휴. 그런 소소한 반가움과 바꾸기엔 이 불편함이 너무 크네요.
그 얼굴은 막 우주선에서 내려온 금성인이 인간과 조우할 때의 표정 같았습니다. 으음. 하여간 강한 표정이었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