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피리아

 


제가 가장 처음 본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는 <검은 고양이>였습니다. 조지 로메로와 함께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을 각색한 프로젝트였는데, 다리오 아르젠토는 <검은 고양이>를, 로메로는 <발데마르씨에게 생긴 일>을 각각 만들었어요. 저는 <검은 고양이>를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포의 단편에 흐르는 불길하고 음침한 분위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무표정한 얼굴의 중년남성이 살인마로 변해가는 묘사는 확실히 번뜩이는 데가 있었습니다. 죽음의 장면이 주는 박력도 대단하구요. 하지만, 제가 푹 빠질만큼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이 감독의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게 된 것은 <마스터스 오브 호러>의 <제니퍼>라는 에피소드를 본 다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 단편 사이에는 공통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어요. 아무 정보없이 영화를 보았다면, 저는 두 작품이 같은 감독의 영화인줄 알아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니퍼>의, 시원시원한 고어는 뒤이어 제가 보게된 <서스피리아>나 <슬립리스>의 아르젠토의 스타일과는 많이 다릅니다. 물론 저는 그 시원시원한 고어와 야성에 가까운 마성에 관한 뻔뻔한 묘사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이 아르젠토의 세계와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검은 고양이> 쪽의 무뚝뚝한 아슬아슬함이 훨씬 이 남자의 세계와 가까운 것입니다.
<검은 고양이>와 <제니퍼>는 나름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검은 고양이>와 <제니퍼>는 둘 다 원작이 따로 있는 영화입니다. 제가 본 다른 아르젠토 영화와는 다르게 그런대로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거에요. 저는 그래서, 이 두 영화를 더 의미있게 기억할 것 같습니다.

아르젠토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말을 할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추천한 것은 바로 이 <서스피리아>였습니다. 어떤 지인은, 이 영화는 자신이 한동안 넘어설 수 없었던 공포였다며 극찬하기 까지 했어요. <페노미나>나 <스탕달 신드롬>을 추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연 으뜸은 이 <서스피리아> 였어요.

무엇보다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의 미술이에요. 이 영화는 정말 화사하고 예쁩니다. 주인공의 앳되보이는 얼굴에서 시작하여, 발레학교의 내부, 마녀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등은 마치 동화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습니다. 호러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너무 기괴한 방식으로 어울리기 때문에 무어라 말하기가 힘드네요. 또한 이 영화의 살인장면은 정말 박력 있습니다. 첫번째 살인의 느낌은 굉장해요. 호화롭고 아기자기한 호텔의 내부와 시체가 처해진 잔혹하고 아크로바틱한 상황, 새빨간 선홍빛의 피가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느낌은 아주 독특합니다. 이것이 아르젠토의 스타일이라 부를만한 것인가요?

하지만 이 외에, 저는 이 영화에서 딱히 호감가는 구석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특히 각본에는 아주 문제가 많아요. 언젠가 Arborday님은 '결말 말아먹기'라고 표현하셨는데, 그걸로는 모자란 듯 합니다. 이것은 애초에 결말을 짐작할 수도 없는 헝클어진 이야기거든요. 물론 아르젠토의 영화에서, 각본이 주는 미스테리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이 귀여운 아가씨가 겪게 되는 끔찍한 나날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테니까요. 하지만, 심한 것은 심한 거에요. 마녀에 관한 설명이 나오자, 저는 정말이지 그 어느것에도 놀라지 않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참 이상해요. 이 사람이 각본을 쓴, <시체들의 새벽> 같은 것은 정말 무리없이 보았단 말이에요. 이것은 비교적 느슨하게 진행하다가 한 번씩 꽉꽉 옭아매주는 아르젠토 특유의 리듬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 한번의 임팩트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다른 부분이 늘어지는 부분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던가, 아니면 아예 안 쓰고 있는 것일지도요.

 

by 이녘 | 2006/08/30 20:26 | For horror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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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rborDay at 2006/08/30 21:09
배우에 의존하지 않고 컷 전체를 지배하는 완벽에 가까운 편집증, 그리고 강렬한 색감의 사용, 살인의 미학이라고 불릴만한 멋진 장면들. 정말 허접한 결말부. 사실 그 모든 것을 이 작품 하나만 놓고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고질적인 이태리 호러물들의 단점이기도 하죠. 시나리오의 부실 혹은 부재.

알젠토 영화들, 특히 초기작들을 보면 악마적 동화의 세계를 구축해놓은 듯한 느낌이 들어요. 특히 원색에 의존하는 화면은 정말 감각적이죠, 음악은 또 어떻구요. 개인적으로 알젠토의 장점 아니 서스페리아의 장점은 완벽한 연출과, 환상적인 조명의 사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딥레드' 한 편을 더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알젠토 스타일은 이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차, 다리오 알젠토는 '시체들의 새벽'의 각본을 썼다기 보다는 제작자로서 시나리오를 감수한 정도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각본에 알젠토가 이름을 올리고 있었던가요?
Commented by 이녘 at 2006/08/30 21:26
네이버를 과신하면 안되겠네요. 마지막 내용은 수정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보니, 시체들의 새벽의 음악을 고블린에서 맡았군요. 으음. 아르젠토가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은 확실히 멋들어진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사람에 대한 호감은, 추천해주신 딥레드를 본 다음으로 유보해야겠습니다.^^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8/30 21:49
어쩌면, 화려찬란한 스타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을 때는 각본에 여력을 쏟을 만한 능력이 되는 건지도 모르지요. 세르지오 레오네의 걸작 [옛날 옛적 서부에서] 스토리에도 관여했고… 경력을 보니 감독 경력 이전에 작가로 먼저 시작한 사람이네요.

최근에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문제에 대해 지적한 재밌는 글을 보아서 링크(?)해 봅니다. (글 쓰신 분은, 링크한 게시판에서 검색해보시면 아시겠지만 공포 영화 쪽에 특히 관심과 조예가 깊으신 분이시기도 하고… 그런 거랑 상관없이 글을 재밌게 쓰셔서 나름대로 팬이랍니다)

http://djuna.cine21.com/bbs/view.php?id=review&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43
Commented by 이녘 at 2006/08/30 22:02
듀나게시판이군요. 얼마전에 <제니퍼> 리뷰를 뒤적이다 보았었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 아르젠토의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해서, 저 글이 담고 있는 정보를 이해하기 힘드네요.
으음. 가장 큰 문제는, 아르젠토의 창의적이고 화려한 살인이 저에게 큰 쾌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인듯 합니다. 이상해요. 저는 늘 그런 것에 끌려왔는데요. ;ㅁ;
Commented by sabbath at 2006/08/30 22:11
참, ArborDay 님 말씀처럼 다리오 아르젠토는 [시체들의 새벽]의 제작자이지 각본가는 아닙니다. 아르젠토가 [시체들의 새벽]에 영향력을 미친 점이 있다면 유럽 개봉판 편집자 노릇을 했다는 정도지요. 앵커베이의 궁극판 DVD를 보시면 확인할 수 있는데, 고블린의 음악만 해도 로메로 편집본과 아르젠토 편집본의 음악이 완전히 다를 정도랍니다.
Commented by ArborDay at 2006/08/30 23:32
사람 취향이 원래 오락가락하는 것 같아요.
제가 군에 가기전 좋아하던 감독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정말 많이 달라졌답니다.
Commented by 이녘 at 2006/08/30 23:52
sabbath님. 예전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sabbath님의 번역센스는 복거일을 떠올리게 하네요. ^^

ArborDay님. 사실 전, 한 때는 공포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을 괴짜 취급 했었답니다. 취향 바뀌는 것. 참 순식간이네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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