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중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이슈를 보다보면, 가끔 어떤 판단도 내리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어느 쪽도 손을 들어주기는 힘든데, 그렇다고 둘 다 옳다거나, 둘 다 옳지 않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시원하지가 못한거죠. 이럴 때 제가 하는 것은 판단중지입니다. 판단을 미루거나, 농담으로 치부해버리는거죠. 저는 이런식으로, 많은 민감한 문제들을 헤쳐왔습니다.

가령 이런 것을 보세요.






이 사진이 떠돌기 시작했을때 이른바 "똥내나는 개마쵸"들이 얼마나 좋아했을 지 대충 짐작이 가요. 질 나쁜 농담처럼 보이는 이 문구들은, "마쵸의 역습"에 쓰일 수 있는 훌륭한 총탄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목적으로 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 안에 담겨있는 논리는 정말 생각이 모자라 보이니까요. 모든 남성들을 잠재적인 성추행범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과격함은, 모든 흑인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만들어버리는 논리와 다를게 없어요. 어느 백인 여성이 흑인 노동자에게 "밤길에 나의 존재가 여성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한다" 라는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 안에 담겨 있는 위기의식은 충분히 실제적이기도 합니다. 밤거리에서 뒤를 쫓아오는 남성은,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길을 지나가던 여성에게 아무 이유없이 시비를 거는 사람도 물론 있구요. 엘리베이터에 단 둘이 남았다가, 뜻밖의 봉변을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많은 게시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일어나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에요. 어느 날엔가, 정말이지 재수가 없는 어떤 사람에게 생길 법한 경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두가지 정당성의 충돌을 경험하게 되요. 하나는 열 명의 범인을 풀어주더라도 단 한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말아야한다는 논리, 또 하나는 열 명의 무고한 사람 사람 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한 명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둘 중 어느 쪽 손을 들어주어야 할까요? 글을 시작하며 밝혔지만, 정말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선뜻 한 편에 설 수 없어요.

이럴 때, 저는 호신술을 익히거나, 호신기구를 소지하라는 말을 해줘요. 세상은 남녀를 불문하고 위험한 곳이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닥쳐올 수 있는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호소보다는 확실한 대비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리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지하철에서 슬쩍슬쩍 지분대는 아저씨에게 스턴건을 쏘아댈 수는 없으니까요. 의식의 변화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고, 괜한 의심이 불편한 쪽도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판단을 미루어버려요. 미래로. 내게 심각한 문제가 될 때 까지.

이것은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좋은 방법은 현명한 선택을 내리는 거죠. 하지만, 저는 성급하게 나쁜 선택을 내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도 않습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이, 너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by 이녘 | 2006/09/06 22:24 | For society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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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海月 at 2006/09/06 23:48
오래전 어떤 게시판에서 봤던 사진이군요. 솔직히 좀 울컥하더군요. 여성들의 입장에선 구구절절 옳은 말이긴 하지만 밤길에 우연히 여성들 보게 된다면 그냥 뒷길로 걸어가야 하나 고민도 했었습니다. ㅜㅜ
뭐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밤길에 앞에 가던 여성분이 갑자기 뒤볼아 보는 바람에 화들짝 놀랬적도 있었는데...하핫.
이런 문제는 쉬운 듯 너무 어려워요.
Commented by 이녘 at 2006/09/09 17:59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10번을 실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으음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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