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 부수기

 
넷은 또 다시 시끄럽습니다. 이번에는 정지영 아나운서의 대리번역 때문이에요. TV를 많이 보지 않는 저로서는, 이 사람을 TV를 켜면 가끔 나오는 굉장히 예쁘고 딱딱한 아가씨라고만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오목조목 하게 생긴 이목구비로 스크립트에서 벗어나지 않는 진행을 하는, 다소 심심한 아나운서요. 하지만 이 사람은 지금 부도덕과 부정직의 화신입니다. 저는 애초에 이 사람한테 걸었던 무언가가 없었기에 덜 분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정지영 아나운서에게 보내는 비난은, 단순한 단죄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정지영 아나운서의 죄는 무엇일까요? 대리번역을 한 것? 거짓말을 한 것?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축재를 한 것?

모두 옳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여죄에 불과해요. 이 사람의 진짜 죄는 바로 배신입니다. 대중을 배신한거죠. 대중이 가지고 있던 환상을 배신한 죄로, 이 예쁘장한 아나운서는 매를 맞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가면으로 삼아왔던 것들. 올바름, 공정성, 정직함 따위의 가치들은 단순히 정지영 개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이 아가씨를 공유된 장난감 삼아 투사한 속성들이죠. 사람들은 정지영 아나운서의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 세련된 옷매무새 이상의 것을 바랐습니다. 정지영이라는 사람이 아름다움과 지성, 도덕성을 갖추고 있다는 환상을 통하여, 사람들은 마치 오락을 즐기고 상품을 소비하듯 정지영을 사용했던 거에요. 좀 애매한 상품이지만요.

하지만 이 상품에 하자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문제가 생겨납니다. 정지영이라는 사람은, 반품이 불가능하고 사후서비스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을 활용한 교환관계는, 상품소비보다 훨씬 복잡한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거든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즐기고 있었던 것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그것을 보상받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분노하는거죠.

정지영의 죄는, 그녀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인간적이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유혹에 흔들립니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대체 왜 머뭇거리겠어요? 그게 불법이어서요? 옳지 못한 일이어서요? 대리작가나 대리번역은 하나의 관행에 가깝고, 출판사에서도 심각하지 않은 문제로 설명했을 거에요. 아니면 이 사람이 일억원이라는 돈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건 모험을 했을리가 없지요. 자신에게 공적인 투명함이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 알지 못할리가 없잖아요? 단지 그것이 자신의 미래와 직결되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 뿐입니다.
이 사람의 잘못은 실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간적인 결점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보인거죠. 브라운관의 장난감에서, 흠이 있는 인간으로 떨어진 것이 이 사람의 궁극적인 잘못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일련의 사태들이 그저 조금 더 규모가 커진 장난감 부수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난감에 싫증나거나 무언가 문제를 발견했을 때, 이리저리 휘두르고 집어던져서 망가뜨리곤 하잖아요. 화가 나서요. 사람들이 지금 게시판 여기저기에서 하고 있는 일들도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이러다가 화가 풀리면 다른 장난감을 찾겠지요.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다시 망가뜨릴 것입니다.

 

by 이녘 | 2006/10/20 21:59 | For society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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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海月 at 2006/10/21 14:06
관련된 모든 사람이 비난을 받아야 할 문제지만 저는 특히 출판사가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인으로서의 기본 윤리도 없는 저런 업체는 망해야되요. 하지만 이미 큰 돈을 벌었군요. (쳇..)
가뜩이나 출판불황이라는데 이런 일이 생길수록 보통의(혹은 영세의) 출판사들은 정말 힘빠지죠. 독자들도 그렇고...
Commented by 이녘 at 2006/10/21 19:42
돈이 되는걸 어쩌겠어요. 사실 그 기본 윤리를 지켜주는 곳이 얼마나 있다고. 저는 대선후보들 자서전을 대필해준 사람들이나 먼저 양심선언 했으면 좋겠어요.
Commented by 로퍼 at 2007/02/23 12:07
재미있는 해석입니다. 보통들 책 독자 역자 출판시장 등등의 시각에서만 바라보는데..신선하네요.


아, 글을 잘 쓰셔서, 즐거워하며 주욱 읽어내려오다가 어쩌다 넉 달 지난 글에 답을 달게 되었습니다 ;;
(너무 이상하게 생각지 마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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