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21일
정성일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
저는 지금 정성일의 홈피에서 예전 영화평들을 뒤져보고 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키노 시절에 올렸던 글이지요. 이 사람이 키노의 권두에 썼던 글들은 영화의 미래에 대한 소명의식과 비판정신이 철철 넘쳐흘러요. 영화의 상업논리와, 시대에 직면하는 예술로서의 소명, 자신의 정치적 입장, 그리고 영화를 진지한 예술로 다루기 위한 평론가로서의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들은 참을 수 없이 진지해요. 제가 못견뎌하는 것은 바로 그 대목입니다.
진지하고 세련된 비평을 보고 싶다면, 저는 당장 '문학과 사회'나 '문학동네'를 펴들 것입니다. 영화연구나 영화비평의 테크닉은 문학비평의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는 편이니까요. 세련된 영화연구가 보고 싶다면 슬라보예 지젝을 읽으면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제가 즐기고 싶은 것은 예술로서의 영화나, 사명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즐거움으로서의 영화입니다. 저는 즐거움을 말하는 비평을 보고 싶습니다.
제가 키노시절의 정성일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그래서일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람의 진지한 연설이 거의 우스꽝스러워보이기 까지 해요. 이 사람의 고민은, 이미 백여년 전 부터 우리 문학이 가져왔던 고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혹은 파시즘 사회에서, 혹은 또한 어떤 사회에서 내가 사랑하는 예술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어디인가에 대한 의문. 이것은 문학을, 혹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물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을 수 없이 낡은 것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늘 나와 있어요. 우리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고, 그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반항이란, 바로 견디는 것이지요. 그러한 절망적인 인식 사이에, 아직도 즐거움을 주고 있는 문학, 혹은 영화라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한 만족은 멀리 사라지고 맙니다.
생뚱 맞지만 듀나를 이야기해볼까요. 제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사람이 정성일이나 김영진보다 글을 잘 쓰거나, 뛰어난 해석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듀나에게는 야심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이유일거에요. 이 사람에게는 영화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사명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영화라는 놀이터에서, 새로 갖게 된 장난감을 예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비교해가며 얼마나 재미있는가를 분석하려들죠. 듀나는 이렇게 자신이 만들어놓은 작은 놀이터에서 뛰놀고 있을 때가 가장 신나보입니다. 또 빛나고 있구요.
언뜻 들으면 이 사람에 대한 비난같아 보이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저는 이 사람의 작은 세계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듀나가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 무언가 의식을 내비치려 할 때마다, 듀나의 글은 한 없이 위태로워집니다. 듀나가 겪었던 몇몇 필화들은 다 그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제가 정성일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영화의 이방인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의 소명과 미래와 같은 주제는, 한국 컴퓨터 게임의 소명과 미래와 같은 주제만큼이나 아득하고 심심하게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그런만큼, 저는 즐거움을 말하고 싶습니다. 영화를 보는 즐거움. 영화평을 읽는 즐거움. 이것은 정성일이 저에게 가르쳐주지 못한 것입니다.
진지하고 세련된 비평을 보고 싶다면, 저는 당장 '문학과 사회'나 '문학동네'를 펴들 것입니다. 영화연구나 영화비평의 테크닉은 문학비평의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는 편이니까요. 세련된 영화연구가 보고 싶다면 슬라보예 지젝을 읽으면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제가 즐기고 싶은 것은 예술로서의 영화나, 사명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즐거움으로서의 영화입니다. 저는 즐거움을 말하는 비평을 보고 싶습니다.
제가 키노시절의 정성일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그래서일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람의 진지한 연설이 거의 우스꽝스러워보이기 까지 해요. 이 사람의 고민은, 이미 백여년 전 부터 우리 문학이 가져왔던 고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혹은 파시즘 사회에서, 혹은 또한 어떤 사회에서 내가 사랑하는 예술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어디인가에 대한 의문. 이것은 문학을, 혹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물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을 수 없이 낡은 것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늘 나와 있어요. 우리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고, 그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반항이란, 바로 견디는 것이지요. 그러한 절망적인 인식 사이에, 아직도 즐거움을 주고 있는 문학, 혹은 영화라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한 만족은 멀리 사라지고 맙니다.
생뚱 맞지만 듀나를 이야기해볼까요. 제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사람이 정성일이나 김영진보다 글을 잘 쓰거나, 뛰어난 해석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듀나에게는 야심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이유일거에요. 이 사람에게는 영화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사명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영화라는 놀이터에서, 새로 갖게 된 장난감을 예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비교해가며 얼마나 재미있는가를 분석하려들죠. 듀나는 이렇게 자신이 만들어놓은 작은 놀이터에서 뛰놀고 있을 때가 가장 신나보입니다. 또 빛나고 있구요.
언뜻 들으면 이 사람에 대한 비난같아 보이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저는 이 사람의 작은 세계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듀나가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 무언가 의식을 내비치려 할 때마다, 듀나의 글은 한 없이 위태로워집니다. 듀나가 겪었던 몇몇 필화들은 다 그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제가 정성일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영화의 이방인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의 소명과 미래와 같은 주제는, 한국 컴퓨터 게임의 소명과 미래와 같은 주제만큼이나 아득하고 심심하게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그런만큼, 저는 즐거움을 말하고 싶습니다. 영화를 보는 즐거움. 영화평을 읽는 즐거움. 이것은 정성일이 저에게 가르쳐주지 못한 것입니다.
# by | 2006/10/21 10:50 | For movie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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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에 대한 이녘님의 생각, 공감이 가는군요.
문득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정영일이란 사람이 떠오릅니다.
액션가면ケイ님// 아이쿠. 저는 정영일 세대도 아니어요.^^ 사실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도 얼마 안 되어서 옛날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참 할 말이 없답니다.
piri님// 그건 정말 맙소사네요. 성실한 좌파 비평가들은 이게 문제라니깐요(__) 그런데 정성일이 과연 좌파 비평가이려나요. 으음.
가끔은 상업성과 만나는 교차점이 있기도 하지만...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아무튼 정성일 님의 평론은 읽기에 너무 어려워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