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29일
자유만세(1946)
한국영화감독에 관한 책을 보면 꼭 최인규에 관한 챕터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나운규이지만, 그 다음에는 항시 최인규의 이름이 나오죠. 이것은 최인규에 대한 합당한 대접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이 식민지 시기 후반에서 1950년의 전쟁 전 까지 한국 영화를 이끌어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자료가 얼마 없다는 것이 또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얼마전 kmdb에서 조사했던 한국 100대 영화 가운데, 194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로 최인규의 <집 없는 천사>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현재 확인 가능한 40년대 영화가 몇이나 되나요? 해방 이전의 작품을 통틀어 보아야 열 편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그 중 한 편을 꼽은 것이 믿음직한 심사라는 말은 할 수 없겠지요. 거기에 제가 지금까지 확인한 최인규의 영화는 그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품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이 존중받고 있는 것은, 이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던 우리 영화의 전반적인 가난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여튼 이번에 감상한 작품은 최인규의 1946년작 자유만세입니다.
영화는 일본 헌병대와 두 독립투사의 추격전에서 시작합니다. 한 청년은 절벽에서 총에 맞아 죽게되며, 살아남은 '최한중'은 가까스러 도망치는데 성공하지요. 같은 독립투사 동지의 집으로 도망친 한중은, 당분간 '혜자'라고 하는 아는 동생의 집에 숨어 있으라는 조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예측불허의 목적지를 향해 질주합니다. 느닷없이 열린 집회에서 한중은 비록 일본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왔지만, 해방 후 '한민족'의 목소리를 세계에 내기 위해서는 일본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역설합니다. 지금까지의 무력투쟁이 쓸데없는 희생만을 늘렸다는 주장은 비겁하고 감투를 탐하는 소인배의 짓거리로 격하됩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한중은 헌병대에 잡혀간 동료를 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하게 되며 우연하게도 자신을 배신했던 '남구'의 정부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매향이라는 이름의 이 아가씨와 한중은 삽시간에 아주 느끼한 로맨스에 빠져들게 되요. 중간중간 필름이 끊겨 있어 확실히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지만, 아마도 이 아가씨는 자신이 한중을 배신한 남구의 애인이라는 점을 밝히고 용서를 빈 모양입니다.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매향은 한중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한중은 "애인을 위해 무엇을 못하겠소. 한국은 내 애인인데" 라고 대답합니다. 매향은 아주 감격한 목소리로 "애인을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해야해요." 라고 중얼거리죠. 자, 다음 장면입니다. 한중이 머물고 있는 집의 '혜자'라는 아가씨가 소개됩니다. 간호학교에 다니고 있는 이 아가씨는 한중을 생각하며 꽃을 꺾어와요. 밤에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한중을 원망하는 글을 일기에 씁니다. 다음 장면에는 다시 매향이 등장합니다. 집을 빠져나와, 한중이 있는 아지트로 향하고 있고, 그녀의 뒤를 (아마도) 남구가 뒤쫓아요. 매향은 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자신의 애국심과 한중을 향한 마음이 하나되고 있는 벅찬 혼돈에 대하여 끊임없이 웅변합니다. "저는 선생님 곁에 꼭 있어야할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책임을 지셔야해요!" 라는 매향의 말에 한중은 '죽어서는 당신 곁에 누워있을 것이라'는 식의 답변을 남기죠. 독립운동 때문에 연애할 틈이 없다나봐요. 이 애절한 마음은, 매향이 꽁무니에 헌병대를 달고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단박에 바뀝니다. 한중은 호쾌하게 따귀를 때립니다. 한중은 아지트에 침입한 헌병들과 싸우다가 총에 맞게 됩니다. 그리고 혜자가 근무하는 병원에 이송되게 되죠. 자아. 이제 마지막입니다. 혜자는 한중을 구할 것을 결심하고, 병원 약제실에서 탈취한 마취약으로 감시병을 쓰러뜨린 후 한중을 구해서 달아납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입니다.
<자유만세>는 해방 이전 최인규가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랑의 맹세>와 여러모로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맹세>는 가미가제 특공대에 지원할 것을 독촉하는 선전영화였고, <자유만세>는 그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투사를 그린 작품이지요. <사랑의 맹세>의 한국인들은 일본어를 하고, <자유만세>의 일본인 들은 한국말을 합니다. <사랑의 맹세>는 일본 해군성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자유만세>는 미군정 치하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즉 <사랑의 맹세>는 노골적인 친일영화였으며, <자유만세>는 항일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명백한 이항대립적 구도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는 상당히 닮아있어요. 두 영화 모두 노골적인 정치의식과 극단적으로 흐르는 센티멘탈리즘이 섞이는 이야기를 지니고 있거든요.
<사랑의 맹세>의 주인공인 '김 에이쥬'는 상해 사변 당시 생이별한 누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이 자신의 누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극단적인 모성의존이나, 자신의 역할모델인 '무라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일반적인 감정반응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것이에요. 에이쥬는 누나로 생각되는 사람의 곁을 떠나가고 싶지 않아 자신이 타고 돌아갈 자동차를 망가뜨리고, 무라이를 닮고 싶다는 마음에 전쟁에 지원합니다.
<자유만세>의 매향은 '한중'을 위해 자신의 정부를 배신합니다. 그녀는 '한국사람이면 날 도와주시오'라는 한중의 말에 계시를 받은 모세만큼이나 흥분해요. 남구에 의해 더럽혀진 자신의 민족의식이 한중을 통해 회복될 수 있다는 걸까요? 매향은 한중을 사랑하는 것을 민족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 경계는 격앙된 매향의 감정 속에서 모호하게 뒤섞여집니다. <자유만세>의 또 한명의 여성인 혜자 또한, 몇 안되는 장면을 통하여 한중을 향한 마음을 표현해요. 그녀에게도 한중을 사랑한다는 것은 '한국'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 속의 애정문제는 곧바로 '한국'을 향한 애국심의 표출이 되어버립니다.
예. 이 두 영화는 노골적인 정치영화인만큼, 노골적인 멜로 드라마입니다. 이런 말이 허용된다면, 최인규의 영화는 정치적인 멜로 드라마입니다. 이 두 영화는 일본 제국주의가, 혹은 다가올 '대한민국'이 얼마나 정당성을 확보한 정치세력인지를 드러내는 데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설혹 기회가 주어져도 상당히 심심한 장면에 그치고 말지요. 최인규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감정의 과잉입니다. 이 영화들에 나타나는 애정과 애국심은 모두 과잉해 있습니다. 매우 도취적이면서도 비이성적이에요. 하지만 정치적인 영화가 언제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던 때가 있었나요? <전함 포템킨>이나 <의지의 승리>가 냉정한 영화라는 말을 할 수는 없겠지요. 이 영화들이 표현하는 것은, 자신이 매료된 대상의 정당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료 자체. 분노와 도취의 과잉한 느낌들이에요. 자신이 충성하던 대상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들이 아직도 힘이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정치권력은 시간이 흐르면 무너지지만, 분노와 도취의 감정은 본질적이며 영속적이니까요.
최인규가 <사랑의 맹세>에서 <자유만세>로 그렇게 쉽게 옮겨갈 수 있었던 점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이 될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핵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과 감상적인 것이 결합하는 영화의 문법이었을 것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에이쥬'가 되느냐 '한중'이 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이 영화의 진짜 알맹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위대함이나, 대한민국 독립의 정당성 같은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욕망이 애국심과 혼연하는 스타일 자체입니다. 따라서, 최인규는 쉽게 친일영화를 찍을 수 있었고, 그만큼 쉽게 항일영화를 찍을 수도 있었던거죠. 이것은 최인규에 대한 변명이 됨과 동시에, 그의 변명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의 영화를 굳이 정치적 주장에 입각하여 감상할 필요는 없어지지만, 그가 해방 이후 끈질기게 주장했던 '어쩔 수 없는 친일'의 주장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거죠.
그렇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이 영화가 지독하게 재미없다는 사실이 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당시 관객 15만명을 모았다고 하네요. 우리 관객들이 관대했던 걸까요, 아니면 그저 이 영화가 나이가 먹은 것 뿐일까요? 아무래도 모르겠습니다.
# by | 2006/10/29 23:43 | For movie | 트랙백 | 덧글(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