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 네 개의 이야기

 
개인적인 이유로 쓰고 있었던 '여고괴담'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요즘 포스팅도 뜸하고, 본 영화도 없어 슬쩍 올려봅니다. 스크롤 압박 주의!!


 

  1. 억압된 것들의 귀환

  

  우리는 어떻게 끔찍함을 즐길 수 있을까? 호러영화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불쾌감이 등장한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현실에 균열을 가져올 때 느끼는 공포, 연쇄 살인마의 금속성 흉기가 주는 위협, 사지절단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역겨움, 극단적으로 뒤틀린 인간 정신이 환기시키는 어떤 기괴함. 합리적인 정신은 지금 나열한 정서들을 긍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른 이후, 이러한 파토스적인 정서는 인간의 상상력 안에 언제나 재생산되어 왔다.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몰락을 지켜보며 공포와 연민을 느꼈으며 단테의 아홉 지옥에서는 종교적인 위엄과 그것을 유지하는 형벌의 체계와 마주쳤다. 사드의 소돔에서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거의 자연철학자에 가까운 관찰에 동참하게 된다. 사드에 따르면 인간의 도락은, 결국 고통으로 나아가게 되어있다.


나로서는 모든게 이해되는 구려. 그러한 불결함을 전부 이해하려면 극도로 즐긴 나머지 무감각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엄청난 방탕으로 모든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되면 불결함까지도 방탕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법이오. 그리하여 즉석에서 그것을 실행하게 되지요. 다들 단순한 것에는 싫증을 느끼고 있어요. 상상력이 화가 나 있는거요. 초라한 방식, 연약한 능력, 정신의 부패는 우리를 증오로 이끈다오. (사드, 『소돔 120일』 中』


  불결함에 관한 성애적 집착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이 변명은, 부정적인 쾌락에 대한 모든 현상에 대입할 수 있을 듯하다. 부정의 체험을 ‘쾌’로 여기는 모든 현상은, 일상적 쾌의 경험들이 그 매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불러일으켜진다. 화를 내는 상상력은, 우리를 소돔으로 이끄는 것이다. 모든 어두운 정서의 체험이 궁극적으로 ‘쾌’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영화관에 들어가기 위해 입장료를 지불하는 순간에 입증된다. 이 두려운 경험이 우리에게 쾌를 주지 않는다면, 자발적으로 대가를 지불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러한 불합리한 쾌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프로이트를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적인 에너지는 일종의 열역학 법칙을 따른다. 계의 에너지의 총합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쾌락원리는 현실원리에 의해 뒤로 물러나고 억압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웅크린 욕망은 어떠한 형태로든 다시 삶의 표면 위로 떠오른다. 프로이트 식으로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부정적 쾌락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등식처럼 쓰여왔다. 부정적인 쾌락 이전에 존재하는 일상이라는 세계는, 압도적이면서도 촘촘한 억압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은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저지당한 곳이며, 현실원칙을 위해 끊임없이 쾌락원칙을 양보해야하는 곳이다. 오이디푸스에게 있어서는, 숙명이라고 하는 억압적 현실이 위치한 곳이었고 사드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쾌락을 방해하는 사법 기관과 종교적 모랄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행위조차 일상이라고 하는 편재하는 감옥 속에서 규제되고 있다면, 그 억압된 에너지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호러영화를 포함하는 호러장르 일반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해준다. 호러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호러는 일상에 대한 괴물의 침입”이다. 안온하고 산뜻하게 안정되어 있는 일상에 나타난 비규범적이며 파괴적인 괴물의 난동이야말로 우리가 여름마다 즐기는 고통의 내용이다.

  그런데, 일상에 침입하는 괴물의 존재는, 애초에 일상에 의해 몰아내어지고 억압된 존재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현대 호러 장르의 선조라 할 수 있는 고딕소설은 계몽주의의 시대에 발흥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 에드가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1839)이나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에 이르는 호러소설의 흐름은, 근대 서구의 합리성이 몰아낸 무시무시한 자연의 침입을 다룬다.

  현대 호러장르에 오면 억압된 것들의 귀환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냉전 시대 매카시즘적인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였던 필립 카우프만의 『신체강탈자의 습격』(1978)1)이나 해체되어 가는 가족과 미국의 질서, 그것을 지탱하려하는 가부장적 남성권력을 그린 조지 로메로의『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2)은 모두 당대적인 사회문제를 노골적으로 이끌어내었다. 현대에 가장 잘 알려진 호러 작가인 스티븐 킹에게선 미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시스템, 특히 가부장적 가족에 관한 공포증적 시선이 자주 노출된다. 『캐리』(1973),『샤이닝』(1977), 『애완동물 공동묘지』(1983)와 같은 작품에서는 한 가족을 지키기 위한 가부장 권력의3) 필연적인 실패에 대해 다룬다.

  이 모든 예는, 일상을 지키기 위한 힘들이 어떻게 우리를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에 대한 극단적인 은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호러 장르는, 바로 그런 역할을 수행해 왔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몰아낸 것들의 귀환을 기다린다. 그리고 억압된 것의 귀환의 과정은, 우리에게 쾌를 가져다준다.

  우리나라의 호러 영화에서도 이러한 과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구체적인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지금부터 살펴보게 될 『여고괴담』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2. 학교라는 이름의 감옥


  2005년에 개봉한 『여고괴담』 4편, 『목소리』는 이제까지 발표되었던 『여고괴담』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목소리』의 유령은 괴물이 아닌 피해자였다. 주인공 영언은 어느날 유령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결말부에 이르러, 영언은 진정한 괴물이 자신이었음을 발견- 혹은 기억해낸다. 하지만 이 ‘괴물’의 존재는 지금까지 『여고괴담』이 만들어내었던 괴물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학교에 의한 피해자였던 이전의 괴물들과는 달리, 영언은 자신의 욕망을 주재하고 그것을 통하여 파괴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는 진짜 악마이다. 학교는 영언에 의해 파괴된다. 영언과 동성애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음악 선생 ‘희연’은 자살하고, 영언의 단짝친구였던 선민에게 다가가는 초아 또한 살해당한다. 영언은 모든 재앙의 중심에 서있었던 것이다.

  이는 『여고괴담』이 만들어온 모든 문법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학교에 의해 파괴되는 학생이 아닌, 학생에 의해 파괴된 학교를 그린다는 발상은 확실히 대담한 전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목소리』가 『여고괴담』에 대한 완전한 전복이라 말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목소리』는 그 모든 배신에도 불구하고 『여고괴담』의 전통 위에 서있는 것이다. 바로 ‘학교’라고 하는 『여고괴담』의 공통된 공간적 배경 때문이다.

  『여고괴담』은 『두번째 이야기』(1999)가 발표되었을 때부터 일관성 있는 기획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억압적인 학교 현실에 대한 과잉된 분노로 가득했던 『여고괴담』과는 달리 『두번째 이야기』는 느리고 몽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여고괴담』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었던 ‘미친개’ 선생의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여고괴담』과 『두번째 이야기』의 공통점이란, ‘여고’와 ‘괴담’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 밖에 없는 듯 했다. 그리고 시리즈를 거듭해갈수록 이것이 단순한 짐작이 아님은 확실해져간다. 『여고괴담』이 폭력적인 학교현실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면, 『두번째 이야기』는 다수에 의해 소외되는 소수의 이야기였으며, 『여우계단』은 가혹한 입시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자에 대한 질투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는 사랑과 집착의 모호한 경계선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망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영화이다. 이처럼 『여고괴담』시리즈의 이야기들은 하나의 주제로 수렴되지 않는다. 반대로 『여고괴담』은 여자고등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괴담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작품 마다 다른 배우, 다른 감독, 다른 주제를 소화하는 가운데 『여고괴담』의 기획은 산만해졌지만, ‘여고’의 ‘괴담’이라는 분명한 경계선 안에 머물고 있다. 『여고괴담』시리즈가 발견한 것은, 그리고 우리가 『여고괴담』시리즈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여고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억압과 욕망의 현전들이다.

  교육기관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학교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의 장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이념의 구체적인 재생산과 유지를 담당하고 있는 정치적 장이다. 하지만 이 장은 결코 자유롭거나 탄력있는 체제가 아닌데, 관료화된 국가기구는 필연적으로 위계적이며 억압적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의 순기능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억압적이며 자기목적적인 괴물로 변하는 것을 자주 목격해왔다. 즉 경찰이나 군대, 학교 등의 기구는 사회적 시스템의 일부로 머물면서 동시에 사회구성원을 압박하고 통제하는 기구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벤담이 말했고 푸코가 재발견한 원형감옥의 한 형태들이다. 물론, 감시하는 자는 언제나 감시당하는 자이지만 『여고괴담』의 주인공들이 가장 낮은 단계의 피감시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억압과 마주해있고, 관료제라는 합리성의 기구가 만들어내는 야만과 마주하게 된다.

  『여고괴담1』은 이 일련의 과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영화였다. 학교라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폭력적인 수단과 그 안에서 망가지고 있는 학생들의 존엄에 대한 고발은 이 학교-감옥의 형태를 가장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이야기였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시 쏟아졌던 수많은 찬사와 그만큼의 비난은 이 영화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야기를 건드렸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학교-감옥의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지만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금기이기도 했다. 학교-감옥과 학생-수감자라는 이분법적 공식에 기초한 『여고괴담1』의 전략은 거칠지만 그만큼이나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여고괴담1』은 단순한 오락영화를 넘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으로 취급받았다. 『여고괴담1』의 후속작이 제작된다고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의미있는 학교고발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1999년에 발표된 『두번째 이야기』는 『여고괴담1』과 정 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영화였다. 『여고괴담1』이 학교와 학생의 대립을 그리고 있었다면 『두번째 이야기』는 학생과 학생의 대립을 그린다.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유일한 교사인 형석은, 효신의 매력에 사로잡힌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으며, 효신과 시은의 동성애적 관계의 주변부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형석은 그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폭력의 주인공은 효신을 둘러싸고 있는 학생 일반이다. 성적 소수자이자 유난히 예민한 감성을 지니고 있는 효신의 존재를 대다수의 학생들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는 당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집단 따돌림 현상에 대한 은유일 수있다.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폭력이라는 현상은, 교사로 대표되는 학교권력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학교라는 시스템이 생산해내는 폭력이었다. 주지하다시피 학교는 통일성을 요구한다. 시간표에 맞추어 돌아가는 수업은 모든 학생을 일률적인 생활 속으로 함몰시킨다. 교복을 통한 인위적인 규격화는 모든 개성을 하나의 외형을 통해 주조시키려는 충동을 드러낸다.4) 이러한 사정 속에서, 규격에서 이탈하고 통일성을 방해하는 소수의 존재는 자연히 껄끄럽게 여겨지게 된다. 따라서 효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은 사실상 학교의 폭력이다. 학교-감옥은 학생이라고 하는 최하층의 피감시자들에게도 계급구분을 만들어내었다. 학생들은 학교의 규칙을 내화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려하는 소수의 존재를 단죄하게 된다.

  『두번째 이야기』는 여러모로 탈규범적인 영화였다. 학교-감옥이 가지고 있는 폭력적인 구조를 고발하는 한편, 『여고괴담』이 지니고 있던 학교와 학생의 이분법적 대립으로부터도 벗어나려 했다. 심지어 『두번째 이야기』는 호러영화의 장르적 경계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두번째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느릿느릿하고 예쁜 영화이다. 호러이기보다는 퀴어 로맨스에 가까운 『두번째 이야기』는, 『여고괴담』의 가능성을 상당히 열어주었다. 『여고괴담』은 노골적인 분노를 표방하지 않아도 좋았으며 노골적인 호러영화가 아니라도 좋았다. 각 시리즈마다 공통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여고괴담』의 이야기들은 바로 『두번째 이야기』가 개척한 성과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인 『여우계단』은 마찬가지로 앞의 두 언니와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 『여우계단』은 질투에 관한 이야기이다. 친한 친구이자, 입시전쟁의 경쟁자인 소희에게 느끼는 진성의 파괴적인 질투가 영화의 중심적인 소재이다.5) 『여우계단』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입시라고 불리우는 폭력적인 현실과 그것이 파괴하는 인간적 관계들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진성과 소희는 입시제도 안에서 서로를 죽이는 괴물로 변모한다. 『여고괴담1』의 가해자가 학교라는 억압적 시스템 자체이고, 『두번째 이야기』의 가해자가 학교라는 시스템에 동화된 다수 학생이었다면, 『여우계단』의 가해자는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된다. 학교라는 이름의 폭력은, 가장 기초적인 인간관계 속으로도 스며드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진성과 소희의 관계보다 훨씬 힘 있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바로 혜주를 통한 폭력이다. 혜주는 뚱뚱한 자신의 외모를 혐오한 나머지 거식증에 걸린 소녀이다. 강박적으로 날씬한 몸매를 욕망하는 이 소녀의 모습에서, 규격화된 신체에 대한 강요를 읽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날씬하고 재능 있는 윤지를 살해하는 혜주의 모습은, 『여우계단』이 그려내고 있는 가장 힘 있는 고발 중 하나였다. 입시라고 하는 억압적인 시스템과, 날씬한 몸이라고 하는 마찬가지로 억압적인 사회적인 규격은 소녀들을 괴물로 만드는 것이다.


  3. 매혹과 억압의 시선


  마지막으로 『목소리』에 이르게 되면, 괴물의 자리바꿈이 이루어지게 된다. 억압적인 시스템 속에서 점점 더 능동화되기 시작한 괴물들은 드디어 학교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목소리』에는 억압적인 학교-감옥에 대한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괴물은 자신의 욕망에 의거하여 학교를 파괴한다. 영언은 친구를 살해하고 자신이 집착하는 사람을 차지하기 위해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해한다.6) 여기에서 학교가 가하는 유일한 억압은, 영언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경계선이라는 점 뿐이다. 그런데 이는 『여고괴담』시리즈에 대한 무의식적인 패러디로 보인다.

  『여고괴담』은 억압적인 학교-감옥의 현실을 지속적으로 고발하는 한편, 그 시스템 안에서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여고생을 괴물로 타자화 해왔다. 이는 고발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하지만, 남성 감독에 의한 여성의 타자화라는 과정이기도 했다. 『여고괴담』안에 드러나고 있는 여고의 일상은 전부 남성 감독의 시선으로 재조정된 것들이다. 극단적인 우정에 의해 불러일으켜지는 동성애적 긴장은, 기괴하면서도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는데 『두번째 이야기』의 효신과 시은의 관계는 매우 로맨틱하지만, 그것이 성숙한 이성남녀의 사랑이었다면 정신병적인 면모가 훨씬 부각되었을 것이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또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는 여고생들의 인간관계는 사실 남성 감독의 관음증적 시선으로 포착된 것이라는 의심을 지우기 힘든 것이다. 이는 ‘여고’의 이야기를 ‘괴담’으로 바라보는 남성 감독, 나아가 남성 응시(MALE GAZE)의 양상을 암시한다. 『여고괴담』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권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목소리』는 『여고괴담』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전통에 매달려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여고괴담』의 한 축이 학교-감옥에 대한 고발이었다면, 나머지 한 축은 미성년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선이었다. 이것은 자연을 거부하면서도 매혹되었던 고딕소설의 시선, 나아가 자연에 매혹되면서도 이를 지배하였던 인간 문명의 시선이기도 하다. 

  즉 『두번째 이야기』속에 드러나 있는 소외된 자들의 세계에 대한 옹호와 매료는 고발을 위한 전략적 선택일 뿐 아니라 억압적인 시선이기도 했다. 우리가 『여고괴담』의 주인공들에게 느꼈던 공포와 매료의 이중적인 감정들, 아름다우면서도 파괴적인 소녀들이 제공하는 괴담은 ‘여고’를 타자화시키는 가운데, 체계 밖의 괴물로 만들었던 것이다. 『목소리』에서 전경화된 소녀적인 팜므파탈의 존재는 이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여고괴담』시리즈의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으며, 『목소리』는 그 가능성의 한 끝을 보여준 것뿐이다.

  영언은 『여고괴담』의 주인공들이 지니고 있었던 모든 매혹적인 속성과 파괴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영언은 아름다운 소녀이며,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감성과 빛나는 재능으로 어른을 유혹한다. 그녀는 강한 결속력으로 자신의 친구를 옭아매고 있으며, 자신의 매력을 이용하여 다른 관계를 끊어놓기도 한다. 이러한 예민하고 파괴적인 아름다움은, 여고라는 공간에 어른 남성들이 투사한 매혹의 기호들이다.  즉 여고라고 하는 금남의 지역에 대해 떨어뜨린 관음증적 욕망과 이상화의 양상들인 것이다. 『여고괴담』은 처음부터 이러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여고괴담』의 감독들과 관객들은, 이것을 여고라고 하는 폐쇄적인 공간의 독특한 아름다움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고괴담』의 이야기는 학교-감옥의 억압을 해체하는 가운데 또 다른 억압을 실천해왔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여고괴담』은 남성의 시선을 드러냄으로써, 학교라는 기구의 상위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남성 중심적 권력지배의 존재를 드러낸다. 물론 이것은 『여고괴담』만의 한계가 아니다. 반대하는 가운데 강화하게 된다는 푸코의 역설을 떠올려본다면7) 이는 모든 부정의 예술이 지니고 있는 공통의 위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억압된 것들의 괴담


  『목소리』의 이야기는 이러한 남성의 시선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을 해체할 발판을 마련한다. 미성년 여성이 괴물로 화하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선보임으로써, 『여고괴담』이 자신도 모르게 은폐해왔던 시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첫 번째 전제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학교는 진실로 보편적이며 또한 불가해한 경험이다. 우리는 가장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시스템이 행하는 야만을 모두 경험하였다. 지배의 편리를 위한 폭력,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핍박, 극단적인 학력사회가 만들어내는 일그러진 경쟁. 그리고 이 모든 관계가 이리저리 교차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기괴하고 격렬한 인간관계. 어른들이 만들어낸 억압적인 학교를 경험하는 동안, 소녀들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정신은 극단적인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기형적인 환경이 기형적인 정신을 만드는 것이다. 동물원에 수감된 동물들이 저지르는 극단적 폭력성향에 대한 보고서를 읽어본다면, 『여고괴담』안에 등장하는 괴물의 모습이 그렇게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학교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그것은 학교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가 가장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에서 조차 그러하다.

  『여고괴담』이 참으로 생산적인 아이디어인 이유는 그래서이다. 학교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이며, 억압의 실천이고, 야만이 행해지고 잉태되는 곳이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경험했다. 스티븐 킹의 ‘가족’이 진실로 미국적인 경험이고 미국적인 억압의 현장이라면, 학교는 진실로 한국적인 경험이요 한국적인 억압의 현장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억압의 양상과, 억압이 잉태시킨 괴담이 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경험했던 학교의 야만이 『여고괴담』을 통하여 귀환하는 것을 지켜본다. 이것이 『여고괴담』이 계속하여 생산되는 힘일 것이다. 이를 두고 한국적 호러의 한 가능성을 본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비약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90년대에 슬래셔 무비와 2000년대 일본 호러의 재생산에 그치고 있는 우리 호러 영화 안에서, 의미있는 하나의 목소리라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by 이녘 | 2006/11/25 20:39 | For horror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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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여관주인 at 2006/11/28 12:00
학술담론의 재활용;; 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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