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봄 (1941)

 
영화는, <춘향전>의 한 대목에서 시작합니다. 거문고를 뜯고 있는 춘향을, 이몽룡이 찾아가면서 시작하죠. 춘향과 이몽룡이 부둥켜 안고 있는 사이, 카메라는 점점 뒤로 물러나고, 현대적인 복식을 갖춘 사람들이 드러납니다. 예. 이들은 영화 <춘향전>을 찍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는 카메라는 영화 <반도의 봄>을 찍고 있지요. 이 영화는 일종의 메타영화인 셈입니다. <반도의 봄>은 <춘향전>이라는 영화가 완성되기 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몇몇 사실을 짚고 넘어갈까요? 우선 1940년대에는 춘향전 영화가 제작된 적이 없습니다. 1923년에 한번 무성영화로 제작되었고, 1935년에 유성영화로 한번 더 제작되었을 뿐이지요. <반도의 봄>속 <춘향전>은 허구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도의 봄>은 꽤 실증적인 메타영화입니다. 거기에 꽤 세련된 메타영화이기도 해요. 이 영화가 실질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반도영화제작주식회사'의 탄생입니다. 사실, 영일과 정희의 로맨스는 부차적이기까지 해요. 이 영화에서 쏟아붇고 있는 시간이 어찌되었든 간에요.

줄거리를 소개해볼까요? 영화제작자인 영일은, 동경에서 돌아온 자신의 친구로부터 여동생 정희를 소개받습니다. 정희는 영화배우를 꿈꾸고 있다고 해요. 마침 영일의 주도 하에 제작되고 있었던 <춘향전>은 제작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성춘향 역을 맡았던 '안나'가 연기를 그만둔다고 청천벽력같은 선언을 했기 때문이지요. '영화를 찍는 동안 물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춘향전>의 배우들은 모두 자원봉사나 다름없습니다. 계약파기로 위약금을 요구할 수도 없는것이, 애초에 계약서를 쓴 일도 없고 수당을 받는 일도 아니라는거죠. 1940년대의 영화판은 이렇다는 것입니다. 영화감독이 6개월 째 방세가 밀려 사용자 측에 수당을 요구해도, 그것은 계약 내용과 다르다며 퇴짜를 놓을 뿐입니다. 애초에 계약내용이 제작비용만 낼 뿐 개인적인 수당은 지급하지 않는 형태였다고 하네요. 심하죠? 예나 지금이나 영화판 사정이 열악한 것은 매한가지인가 봅니다. 하여튼 안나가 영화를 그만두는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거죠. 그녀가 아무리 '딴스홀'에서 일했던 여자로 폄하되고 있지만 말이에요. 정희는 안나의 자리를 대체하여 여배우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대단한 재능을 발휘하죠(__)
그런데, 영일은 꽤 골치아픈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주인공이 그만둘 정도로 <춘향전> 제작환경이란 열악하기 그지없지요. 영일의 상사는 여배우들과 연애하기에 바쁘고, 감독 및 스탭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겐 생활을 위한 그 어떤 임금도 지불되고 있지 않지요. 감독이 <춘향전>을 포기할 뜻을 비치자, 영일은 극약처방을 쓰게 됩니다. 회사 공금을 횡령하기로 한거죠. 본인 스스로도 들키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겠지요? 영일은 며칠 후 경찰서에 잡혀들어가게 됩니다. 감옥에 가기 전날 비를 맞아 쇠약해진 영일은, 감옥에서 더욱 몸상태가 악화되요. 그런 영일을, 바의 마담으로 취직한 안나가 꺼내줍니다. 영일이 횡령한 천원을 대신 갚아주고서 말이지요. 영일이 병원에서 누워있는 동안 안나가 옆에서 병간호를 해줍니다. 그 사이 조선에는 '반도영화제작주식회사'가 만들어져요. 100만원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반영'은 신체제 속에서 대중들이 원하는 영화, 그리고 내선일체를 통해 황국신민을 만들어내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답니다. 영일은 그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뻐해요. 드디어 조선에도 번듯한 영화 '기업'이 만들어졌다는거에요.
영화는 당연한 순서를 밟아나갑니다. <춘향전>은 '반영' 최초의 영화라고 소개되며 개봉하게 됩니다. 그 이전 제작사는 따로 있지 않았냐구요? 아마도 '반도영화제작주식회사'의 모델이라 생각되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는 고려영화사나 조선영화사 등 영화사 몇몇이 통폐합되면서 만들어진 회사였거든요. 고려영화사나 조선영화사도 군소 영화사 몇개가 통폐합되며 만들어진 거였죠. 하여튼 <춘향전>의 개봉일에, 영일이 안나와 함께 찾아옵니다. 평소 영일을 흠모하던 정희는 졸도하죠. 정희의 병원에 영일이 찾아가고, 안나가 정희에게 아름다운 양보를 하면서 영화의 모든 갈등은 끝나게 됩니다. 얼마 후, 영일과 정희는 일본으로 떠나요. 말하자면, 영일이 일본으로 영화유학을 떠나는 것 같습니다. 반도 영화계를 대표로 일본의 선진기술을 배워오라는거죠. 기차가 떠나고, 영일과 정희의 밝은 웃음 뒤로 完 자가 떠오릅니다.

줄거리 요약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겠지만 <반도의 봄>은 무척 세련된 영화입니다. 1945년 이후 만들어졌던 최인규 감독의 <사랑의 맹세>나 <자유만세>, 혹은 <해방전야>와 같은 영화보다 훨씬 영화적으로 세련되요. 시나리오는 탄탄하고, 카메라의 구도는 무척 재미있습니다. 특히 초반 <춘향전>을 묘사하는 장면은 아주 흥미로워요.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다른 40년대 영화처럼 노골적인 친일선전영화가 아닙니다. 적어도 지금의 시선으로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정책영화로서의 요소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반도의 봄>은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입니다. 물론 일제 선전 영화는 모두 기본적으로 멜로 드라마였지요. 차이가 있다면 <너와 나>나 <조선해협>등  다른 영화들이 대부분 일본 징용제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되었다면, <반도의 봄>은 1940년 즈음의 한국 영화계의 상황 자체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1940년 조선영화령이 발표된 후 이루어진 일련의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영화기구의 반국유화를 내용으로 하는 조선영화령은, 영화를 국책선전의 효율적인 도구로 활용하기 위한 일본 제국주의의 영화기구 정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사가들은 이를 두고 잘 돌아가는 조선 영화계를 말살하기 위한 일본의 음모였다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의견이지요. 일본 제국주의는 명백히 사악한 집단이었지만 결코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뭐하러 식민지 산업을 고사시키려 하겠어요.
하여튼 <반도의 봄>은 당시 영화인들이 갖고 싶어했던 잘 정비된 '기업형 영화회사'에 관한 열망을 영화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의 억지스러운 연설은 바로 그런 이유로 삽입되었던거죠. 하기사 이 장면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반도의 봄>이 제작허가를 맡을 수나 있었겠어요. 당시의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일본의 정책을 찬양하고 홍보해야하는 숙명을 떠안고 있었던걸요.

하지만, <반도의 봄>은 비단 선전영화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반도의 봄>이 시치미를 뚝 떼고 보여주고 있는 41년의 경성 곳곳은 아주 재미난 광경으로 가득해요. 영일의 상사가 정희를 데리고 양식을 먹는 장면이라든가 거리에서 차를 태워주고 환심을 얻는 장면 등은 우리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클리셰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됩니다. '네 애인을 구해줄테니 나와 결혼해달라'는 억지도요. 결코 설득력있게 짜여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당당한 '안나'의 모습은 지금에 와서 더욱 흥미롭게 비칩니다. 당시의 '안나'는 정희와 영일의 사랑을 방해하는 인물로 보여질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이 정희의 마음보다 딱히 덜 진실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졸도한 정희보다는 훨씬 많은 희생을 치루었는걸요. 거기에 아주 솔직하게 영일에게 구애하고 있구요. 요즘에는 공공연해진 사실이긴 합니다만, 1940년대의 연애풍속도는 지금 생각하는 것 만큼 꽉 막혀있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반도영화제작주식회사의 첫 영화가 <춘향전>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보통은, 일제시대에는 우리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억압되었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춘향전>은 일본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던가, 일본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한 <반도의 봄>에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비율이 매우 흥미롭게 섞여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조선어를 쓰다가, 또한 일본어를 쓰기도 해요. 그 비율은 누가 주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비슷합니다. 당시 일본인들을 위한 일본어 자막과 우리들을 위한 한국어 자막을 동시에 보고 있자니 참 기분이 묘하던걸요.

마지막으로, 주인공 정희가 참 미인이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네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선이 시원시원한, 조금 인상이 강해보이는 미인이었어요. 생각보다 세상은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남자배우들의 얼굴을 보니 많이 변한 것도 같지만요. 주인공 영일은, 어딘지 모르게 힙합그룹 '지누션'의 션을 닮았더군요.

 

by 이녘 | 2006/12/02 21:56 | For movi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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