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11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영군은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믿고 있는 분열증 환자입니다. 어느날 영군은 자신의 '피복'을 벗기고 전선을 이어 콘센트에 연결시켜요. 충전을 하려 했던거죠. 당연히 영군은 감전 당하고, 곧 정신병원으로 실려가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기괴한 코미디 속으로 빠져들어가요. 예. 이건 기괴한 코미디입니다. 박찬욱식의 뒷맛이 남는 코미디 말이에요.
신세계 정신병원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공간입니다. 곧바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떠오르네요. 그들의 광기는 아주 발랄합니다. 그들의 작태는 분명 혼란스럽고 다소 위험하기까지 하지만, 정상인의 세계에서는 맛볼 수 없는 어떤 일탈의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파우스트가 묘사한 '발푸르기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연원을 지닌 카니발의 세계입니다. 서로 응답하지 않는 목소리들이 혼란스럽게 저마다의 놀이를 즐기고 있는 동안, 우리 또한 이 혼란한 축제를 구경하는 즐거움에 빠지게 되는거죠.
영군은 이 세계 속으로 아주 매끄럽게 빨려들어갑니다. 그녀는 이들의 규칙에 금세 적응하고, 새로운 기계 친구들을 사귀며 '하얀맨'을 죽이기 위한 방법으로 일순을 포섭하죠. 그 사이 영군을 광기로 몰아간 집안의 병력과, 할머니와의 아픈 추억, 존재의 목적을 모르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슬픈 사연이 드러나게 됩니다. 중간중간 일순의 사연도 양념처럼 끼어들고요. 이 모든 퍼즐들이 맞추어지고 나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풍경이 드러납니다.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로서는 드물게 따스한 풍경이지요. 물론 박찬욱은 <올드보이>이후 조금씩 그 희망의 농도를 높여왔지만, 이 갑작스러운 무지개빛 결말은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모든 변명에도 불구하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박찬욱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는 박찬욱식으로 비틀린 인간들의 냉소주의가 결코 감추어지지 않아요. 영군의 어머니나 영군의 주치의에 관한 묘사가 그렇겠네요. 영군의 어머니는 어엿한 광인입니다. 그녀의 광기는 충분히 위험하고 아슬아슬해보여요. 그녀는 순대로 표상되는 육식동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초의 사회적 억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까닭모를 불안을 느끼지 않은 관객은 없을거에요. 그것은 그녀가 세습되는 광기를 표현하는 동시에, 이기적인 광기에 의한 억압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군의 주치의의 경우에는... 영군이 마침내 말할 준비가 될 때마다 언제나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지요. "어디서부터 해나가야할 지 모르기" 때문에 영군이 애써 귀띔해준 순간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선한 얼굴은 그래서 무지라는 이름의 악을 실천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요.
제 경우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은 바로 일순이었습니다. 저는 일순이 영군을 도와주는 동기가 끝까지 해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일순은 자신이 상대방의 능력과 습성을 훔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일순이 베푼 모든 호의와 사랑이 실은 영군의 '동정심'을 훔쳤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일순은 필요 이상으로 보통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일순은 자신의 광기를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해요. 그는 그 광기가 가져오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잘 통제하지요. 영군에 대한 모든 호의는 두 광인이 서로 기대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기 보다는, 비교적 정상적인 일순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영군을 치유하는 과정인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정신지체아를 성폭행했다는 어느 불쾌한 남자의 경우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일순이 "라이스 메가트론"을 시술할 때 행하는 상징적 성행위- 상대방의 옷을 벗기고 그 몸속으로 자신의 일부를 집어넣는 행위는 영군의 광기를 이용한 일종의 폭력처럼 느껴졌습니다. 로맨틱하게 느껴질 마지막 장면도요. 일순은 지속적으로 영군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일순을 위한 유일한 길일지 모르지만, 옳은 방식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네요. 물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굿윌헌팅>식의 눈물 쥐어짜기로 나아가지 않는 데에는 이러한 접근이 유효하게 작용하기도 했지만요.
너무 퉁명스럽게 말한 것 같지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아주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덧붙이자면 아주 재미있는 박찬욱 영화이지요. 박찬욱식의 잔혹한 농담과 코미디가 섞이는 느낌은 아주 괜찮아요. 이 사람은 대놓고 따스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쑥쓰러웠던지 영화 여기저기에 자신의 심술을 심어놓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로맨스'라는 카피는 어느정도는 사실일 수도 있겠어요.
덧. 화제가 된 비의 요들송입니다~_~
# by | 2006/12/11 18:19 | For movie | 트랙백(2)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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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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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느냐와는 상관없이 박찬욱이 재주많은 감독인건 틀림없어 보입니다. 글쟁이로서도 날렸던 것처럼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무엇을 삽입하는데 능하기도 하고.
Arborday님// 박찬욱식 로맨스라네요. ㅋㅋ 저는 박찬욱의 심술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너무 따뜻한 화면을 보여주면 좀 당황스러워요.
세온님// 예. 저도 그 부분에서 끝날 줄 알았어요. 그 부분 맞죠? ㅋㅋ
海月님// 박찬욱 영화치고는 꽤 편안한 심정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처럼 불편함을 즐기는 쪽이라면 살짝 기대치를 낮춰야할지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