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여우 여우비

 


여우비는 이제 백살이 된 어린 구미호입니다. 여우비는 백년전에 북한산 기슭에 불시착한 외계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날 외계인들은 UFO를 다시 만들어 시험운전을 하게 되지만... 그만 뜻밖의 사고로 UFO는 다시 불시착하고, 외계인 하나는 근처로 극기훈련을 떠나와 있던 어린아이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네. 그리고 이 녀석을 구출하기 위한 여우비의 모험이 시작되요.

<천년여우 여우비>는 전형적인 한국 창작동화풍의 이야기에 지브리 풍의 묘사를 뒤섞은 애니메이션입니다. 물론 굵은 펜선이 강조되는 작화나 어딘지 모르게 70~80년대 소년만화를 연상케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한국적'인 냄새가 풍기지만요. '그림자 탐정'의 심장과 여우비의 아지트의 분위기는 노골적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연상시키고, 숲의 묘사나 외계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이웃집 토토로>를 닮았습니다. 물론 이것이 나쁠 것은 없습니다. <천년 여우 여우비>는 자신이 인용자라는 사실을 그리 숨기지 않고 있으니까요. 지브리 풍의 묘사는 노골적이며, 그 외에도 익숙한 패러디들이 상당히 여러번 등장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솔직히 밝히는 것은 흉이 아니에요. 비록 독자적인 스타일을 세웠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것을 매끈하게 이어붙이고 쌓아올린 공도 분명 크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천년여우 여우비>는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입니다. 캐릭터들의 모습은 대단히 매력있고, 몇몇 장면들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분명 지브리 풍의 묘사이긴 하지만,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야기 자체에는 불만이 많습니다. 이 정도의 매끈한 퀄리티를 지닌 작품이 이 정도로 엉성한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는 사실은 아쉬움 그 자체에요. '그림자 탐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황금이와의 우정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구미호 사냥꾼은 악역으로서의 위엄을 부여받지 못했고, 극기훈련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부족했어요. 여우비의 모험도 지나치게 피상적이어서, 이 아이가 인간세상에 느끼고 있는 경이와 두려움, 매력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여우비가 만나게 되는 어린이들이 '왕따 학생'들이라는 점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설정을 통해 무언가 교훈을 의도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음은 물론이고 설령 제 기능을 했다고 하더라도 만족스러웠을지는 의문이에요. 물론 이성강 감독의 전작인 <마리 이야기>나 <별별 이야기>를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천년 여우 여우비>에서의 이성강 감독은 솜씨좋은 이야기꾼은 아니군요. <천년여우 여우비>는 적어도 두 개 이상으로 나뉠 수 있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데 섞어놓은 느낌의 작품입니다. 사실 그 편이 더 깔끔한 결과가 나왔을 거에요. 그림자 탐정과 구미호 사냥꾼 중 하나는 사라지는 편이 낫겠고, 여우비의 모험과 여우비의 사춘기도 따로 다루는 편이 나았을 것 같습니다. 첫번째 경우에는 이야기가 훨씬 압축될 것이며, 두번째 경우는 주제를 압축할 수 있겠죠. 여우비가 외계인을 구출하는 이야기는 문명과 자연에 대한 그럴듯한 우화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여우비의 사춘기 이야기는 말랑말랑한 소년만화 풍의 느낌을 살릴 수 있을 거에요. 이성강 감독은 목적은 이 두가지를 함께 펼쳐보이는 것이었겠지만...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으음...한가지 불만을 더 말해보자면, <천년여우 여우비>의 더빙도 썩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다들 전형적인 '어린이 만화' 성우 더빙을 하고 있어요. 노골적인 지브리 풍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천년여우 여우비>가 풍기고 있는 은근한 80년대 분위기는 이 점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딱히 매력적인 해석을 보여주는 목소리가 없어요. 차라리 자막을 읽는 외국인 관객들이 더 재미있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후우. 싫은 소리를 잔뜩 했지만, 그리 못난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극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어린이 친구들-_-도 퍽 만족해하는 분위기였고, 드문드문 대단히 아름다운 장면도 볼 수 있었으니까요.

by 이녘 | 2007/01/27 23:06 | For movie | 트랙백(2)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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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천년여우 여우비(2회차): 2007.2.1- CGV불광
주말까지 아무래도 뭔가 이일 저일 정신없이 맞물려 돌아갈 것 같은 상황인지라, 아침에 짬 났을때 냉큼 극장으로 달려가 <천년여우 여우비(이하 여우비)>를 한번 더 관람했다. 첫 관람 때는 오랜 친구며 선배들과 함께 즐겁게 보긴 했지만 잠을 별로 못 자서인지 이상하게 뭔가 좀 머릿속이 들떠 있었던 것 같기도 했고, 스토리적인 면에서나 비주얼적인 구성 요소들의 정보량이 은근히 많아서 뭔가 놓치고 지나간 것들이 많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기도 했지......more

Commented by 레인 at 2007/01/28 05:07
아직도 나는 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 항상 배우가 성우를 하느냐 하는게 불만이지.

..........저러면 가수가 연기한다고 나대는것과 다른게 뭐지?
Commented by 달바람 at 2007/01/28 09:04
너무 이것저것 섞여있어서 뭐 하나 제대로 빛이 나는게 없는 느낌이라 정말 여러모로 아쉬웠어요.
Commented by 海月 at 2007/01/28 12:27
저도 배우들이 더빙하는 것에 대해 너무 반대예요. 뭐할까.. 주인공의 나이대의 목소리가 전혀 안나오거든요. 몰입이 안되요, 안돼.
Commented by 이녘 at 2007/01/28 13:15
다들 배우 더빙에 불만이 있군요. 음음. 전 그냥 기본적인 발성훈련을 받은 배우가 했으면 그리 나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손예진 씨나, 공형진 씨, 류덕환씨 모두 그리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는 못했네요.
Commented by 이녘 at 2007/01/28 17:04
달바람님// 첫 '백학' 뮤지컬 같은 건 그래도 봐줄만 했는데요. <미션 임파서블> 패러디는...으음. 그걸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EST_ at 2007/02/02 02:02
잘 읽었습니다. 극장을 어린이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는 말씀에 안도하게 되네요. 전 이 작품이 그리 화제에도 잘 오르는 것 같고 시간대도 안좋은 쪽으로 밀린다는 이야길 들어서 안타까워하던 참입니다.
Commented by 이녘 at 2007/02/02 10:08
그래도...아이들이 퍽 얌전했어요. 가볍게 종알 거리는 아이가 있었지만, 그 정도야 극장의 당연한 효과음이나 다름없는거죠^^ 개인적으로 가장 암담했던 기억은 예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보았던 <오즈의 마법사>였어요. 어느 아버님께서 추억에 젖고 싶어 데려왔나본데....정말 끊임없이 재미없다고 투덜대더라구요. 주디 갈란드가 빛바랜 화면에서 '오버 더 레인보우'를 노래하는 동안 한 시도 쉬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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