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나찌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식상해진 느낌도 있습니다. 수많은 홀로코스트 영화가 만들어졌고, 수많은 소설이 쓰여졌으며, 수많은 다큐멘터리, 수많은 에세이, 수많은 증언들이 있어왔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홀로코스트 이야기는 여전히 의미있습니다. 올 해 번역되어 나온 이 책이 저는 전혀 시대착오적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은 재일한국인입니다. 2세대 재일교포이며, 그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가난을 피해 도일했다고 합니다. 그는 일본어를 모어로 하여 자라났습니다. 한국어를 잊은 한국인으로써,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조센징'으로서 그가 느꼈을 괴리감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은 그에게 이상적인 고향이 되어주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두 형은 고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3공화국 시절 민주화 운동 중에 체포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해 죽었다고 합니다. 이 두가지 사건이야말로 그의 세계관에 항거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는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피해자이며, 또한 인간의 악이 어디에나 있다는 점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서경식이 뒤쫓고 있는 쁘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의 유대인 작가입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고, 1987년에 자살했습니다. 서경식은 종종 "쁘리모 레비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문제는 간단했을 것이"라고 뇌까립니다. 간단한 이야기란 학살에서 살아남은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 잃지 말아야 하는 희망에 관한,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쁘리모 레비는 나찌가 역사에서 사라진 뒤 수십년이 지나 자살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썼던 책의 제목대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쁘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 정착한 유태인이었고, 이탈리아를 고향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찌즘의 인종주의는 점점 유태인을 구분해내기 시작했고, 그 이전까지는 자기정체성의 사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유태인'은 타율적으로 그의 핵심을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우슈비츠를 겪었고... 살아남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아마 레비는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순간에 이웃을 '냄새나는 유태인'으로 뒤바꾸어 버렸던 이웃들을. 어떻게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서경식이 레비를 통해 주장하는 것은 죄는 모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찌의 유대인학살이 몇몇 독일인들, 나찌, 그 중 히틀러의 잘못으로 국한되는 것을 혐오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독일인 전체의 문제였고, 나아가 인류 전체의 죄라고 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그러한 야만을 저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레비의 오랜 고민이었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레비는 자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서경식의 해석입니다. 레비는 인간의 본성에 그러한 야만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늘 불안의 시대를 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서경식의 경험에 의해 보완됩니다. 일본이 행했던 야만들. 그것을 부정하는 일본인. 유태인의 노동력을 착취했던 독일 기업과, 조선인과 중국인을 착취하여 부를 쌓아올린 일본 기업들이 당당히 존속하고 있는 현실, 한국에서 정치범에게 가해졌던 수많은 폭력들. 이 야만과 폭력의 역사는 소수의, 한순간의 광기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광범위하고 전역사적인 것입니다.

유태인은 결국 이스라엘을 건국하며 주변 아랍국을 부당하게 침공했으며, 거의 무저항인 도시들에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역사의 피해자인 그들은 역사의 가해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시오니즘 논리, 인종주의적인 편견은 사실 나찌즘과 같은 자궁에서 나온 것입니다. 20세기 초 까지 분명한 피해자였던 한국은 70년대 베트남에서 끔찍한 일을 저질렀고, 또한 자국민 학살을 광주에서 벌였습니다.

여기에 이르게 되면 역사의 비전이란 암울함 그 자체입니다. 인류는 언제나 최악의 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보다 무서운 것은 홀로코스트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야만을 저지르고 폭력을 행합니다. 불과 몇년 전 일어난 김선일 사건이나 아부 그라이브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폭력의 진영이 얼마나 야만적인지를 말해줍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비인간적인 것이기는 커녕 가장 인간적인 행동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홀로코스트는 유럽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트라우마였고, 그 이후 많은 지식인들은 그것을 잊거나 회피하거나 변명하거나, 아니면 극복하려 했습니다. 모두가 다른 말을 했지만 홀로코스트와 나찌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중 가장 대담한 주장은 사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발언인데...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에 따르면 나찌즘은 인간의 우연한 야만의 결과가 아니라 가장 발달한 이성과 계몽주의의 결과라고 합니다. 인간이 행하는 가장 끔찍한 야만은 인간의 가장 첨단화된 합리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거에요. 인간이 걸어온 길은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인식은 쁘리모 레비나 서경식에게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야만과 폭력을 우연의 작용으로 돌리는 것에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아직도 홀로코스트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야만과 폭력은 결코 특수한 개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며 역사의 우연한 광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있어왔고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군대는 승전 이후 약탈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해왔습니다. 카톨릭의 군대는 남아메리카를 거의 '멸종'으로 몰아넣었고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징키스칸 군대의 잔인함은 그의 제국을 강성하게 만들었고 로마 제국은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폭력과 야만은 언제나 지배와 합리성의 일부였습니다. 문제는, 모두가 그것을 잊거나 부정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일본은 전쟁의 진짜 피해자는 자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이야기하지만, 난징은 부정합니다. 지속적으로 식민지로서의, 강간당한 일본을 각인하면서도 종군 위안부는 부정합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36년을 이야기하지만 베트남은 모릅니다. 유신 정권 때 쓰러져간 '빨갱이'들에 대해서는 모른 체 합니다. 세계의 경찰이라고 하는 미국은 아부 그라이브에서 섬뜩한 폭력의 미소를 보여줬구요.

쁘리모 레비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문제는 간단했을 것입니다. 과거는 극복되었고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으며, 이것은 단순히 외상 후 증후군에 시달리는 우울증 환자의 개인적 고통으로 치부될 수 없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일본'을 잊지 못한 우리에게도 유효할 것입니다. 왜 아직도 상처는 남아있는지. 그리고 (결코 레비와 서경식은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과연 우리는 역사 앞에 결백한 사람들인지.

 

by 이녘 | 2007/01/28 13:58 | For others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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