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최후의 사나이 (1964)

 
<지상 최후의 사나이>는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번안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제목에는 불만이 많아요. 리처드 매드슨의 원래 제목이 가지고 있었던 아이러니한 끔찍함이 다 소거된, 퍽이나 산문적인 문장이잖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직설적인 제목이기도 하지만...아무튼 저로서는 불만입니다.

<나는 전설이다>를 읽어본 지 퍽 오래되어 그 내용이 잘 기억나지는 않네요. 대충 기억을 되살려 보자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흡혈귀로 변해버리고 난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항체를 가지고 있어 홀로 살아남은 어느 남자의 이야기였습니다. 밤이 되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리는 흡혈귀들을 저주하며, 낮에는 스스로 깎아만든 말뚝으로 흡혈귀들을 사냥하러 다닙니다. 리처드 매드슨의 세계에서도 흡혈귀들은 낮에 힘을 잃거든요.
저는 그렇게 까지 재미있게 읽지는 않았지만, <나는 전설이다>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어떤 불길한 비전 같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해버린 후, 이 남자가 느끼게 되는 어마어마한 고독과 절망은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강아지에게 쏟아붇는 애정은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에게 주었던 관심이나 <캐스트 어웨이>의 척 놀랜드가 윌슨에게 쏟았던 우정과 비견할 만합니다. 자신에게 닥쳐온 명백한 함정을 피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은 모두 고독에 지쳤기 때문이겠지요. 모든 인간이 죽거나 흡혈귀가 되어버렸고, 이미 많은 흡혈귀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에 편입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인간이며, 그 항거할 수 없는 운명을 깨닫는 순간 "나는 전설이다"고 자조적으로 선언합니다. 이 순간 느껴지는 파토스는 전율스러운 것이에요. 저는 이와 비슷한 느낌을 <외계의 침입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꼈었답니다.

하지만 <지상 최후의 사나이>는 그러한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은 영화입니다. 인물들의 연기는 지나치게 뻣뻣하고 내러티브는 <나는 전설이다>가 가지고 있었던 많은 장점들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우선 소설의 이야기를 너무 정직하게 모두 보여주려 하다보니 각각의 이야기들이 너무 산만해져버렸어요. 강아지의 에피소드는 조금 더 무게를 부여받아야 했습니다. 사실...이 부분은 원작과 다르지요. 원작에서 강아지는 상처를 못이기고 죽어버리지만, <지상 최후의 사나이>에서는 감염사실을 알아챈 주인공이 말뚝을 박아 죽여버리잖아요? 확실히 살려야할 곳을 살리지 못한 느낌이에요. <나는 전설이다>의 진짜 공포는, 산문적으로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지루하게 미쳐가는 것의 끔찍함에 있었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잔인함과 폭력은 일상이 되어 더 이상 끔찍할 것도 없게 되어버렸죠. 그리고 그나마 나타난 자그마한 빛은 금세 꺼져버리고 맙니다. <지상 최후의 사나이>의 결말은 이러한 <나는 전설이다>의 매력을 상당부분 배신하는 거였어요. 영화는 어느샌가 기관총이 난사되는 B급 활극이 되어버렸고, 어설픈 묵시록적인 이미지가 삽입되고, 불필요한 아이러니가 끼어들었습니다. 조금은 실망스러워요.

물론 이러한 혹평은 지나친 처사일 수도 있습니다. 우선 저는 장르가 세련되게 다듬어진 21세기를 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전설이다>를 보고 결말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일종의 반칙일 수도 있습니다. 또 이 영화가 제시한 이미지가 이후의 호러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요.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흡혈귀들은 여러모로 조지 로메로의 좀비와 비슷한 모양새입니다. 느릿느릿하고 창백한 분장의 괴물들은 바로 4년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이름만 바꾸어 등장했지요. 고립된 공간에서 괴물들에게 대항하는 이야기 또한 이 영화에 힘 입은 바 크겠지요. 정확히는 리처드 매드슨의 공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약속을 희생하고 본 영화라 아쉬움이 많습니다. 다음주에 고전영화관에서 상영하는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를 기대해야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추천하시던데...아직까지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영화를 본적이 없어서 더욱 기대됩니다. 첫 만남이란 언제나 두근두근한 거니까요.


ps. 예술의 전당에 있는 고전영화관에서 보고 왔습니다.  무료 상영이더군요. 영상자료원 측에서 호러타임즈에 의뢰해서 영화의 리스트를 뽑은 모양이에요. 조이SF쪽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영상자료원도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여러모로 힘쓰고 있군요:) 하지만 일반적인 시네마테크와 고전영화관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ps2. 영화 포스터를 못찾겠어요...

 

by 이녘 | 2007/02/02 23:46 | For horror | 트랙백(1)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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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SabBatH at 2007/02/02 23:56

제목 : [지구 최후의 인간(The Last Man on E..
 전체 완성도의 여부와 관계없이, [지구 최후의 인간]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도시라든가 정적 가득한 폐허 속에서 서성이는 한 사람의 생존자와 같은 이미지들은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체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하나의 원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지구 최후의 인간]은 오프닝 크레딧 장면에서 그런 이미지들을 제공했다는 것만으로도 후대 사람들의 입......more

Commented by 시은비 at 2007/02/03 01:39
보고 왔군. 난 알바탈락 -_-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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