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우리나라에는 영화의 이름을 따서 <블레이드 러너>라는 이름으로 책이 나와있지요? 사실 소설 속에는 "블레이드 러너"라는 단어가 언급되지도 않는답니다.

줄거리를 이야기해야 할까요? 신형 안드로이드 "넥서스-6" 여섯이 화성으로부터 탈출합니다. 그들을 잡기 위해 바운티 헌터 릭 데커드가 고용되구요. 그는 하루 동안 넥서스-6 여섯을 모두 은퇴시키며, 그의 삶과 그의 인간성과 그의 정체성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게 됩니다. 

소설 속의 릭 데커드는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중년 백인 남성입니다. 그는 전문가이고,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숱한 안드로이드를 은퇴시키면서도 스스로의 인간성에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에게 안드로이드를 은퇴시킨다는 것은 망가진 기계를 해체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어서 인간적 윤리의식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일 없이 거리낌 없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릭 데커드는, 어느 여자 안드로이드를 은퇴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이 일종의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한 번의 예외는 데커드를 거대한 물음표 속으로 잡아 당깁니다. 그는 살인자가 될 수 없는 보통의 인간일 뿐인데, 일단 안드로이드를 감정이입이 가능한 인간적 존재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의 단단한 세계는 순식간에 허물어지게 되는 거에요. 릭 데커드는 그 혼란 와중에 안드로이드로 오해받기도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에게 일어난 이 변화는, 어쩌면 자신으로 하여금 다시는 안드로이드를 은퇴시킬 수 없도록 만들거라구요.

물론 데커드는 시련을 이겨냅니다. 그는 모든 탈출한 넥서스-6를 은퇴시키고,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바운티 헌터가 됩니다. 그는 자신과의 모든 승부에서 지고 말지만, 뜻밖의 구원을 받고 존엄을 회복해요. 그의 '진짜' 애완동물을 향한 열망은 자신의 인간성을 확인하고 마주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레이첼과 섹스를 하고 은퇴시킴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일말의 공감을 제거하려 하지요. 하지만 데커드는 레이첼을 은퇴시키지도 못하고 마지막에 이르기 까지 진짜 동물을 손에 넣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받아요. 인공신으로부터 인공 두꺼비를 받고는 그 분간할 수 없는 모조품으로부터 위안을 얻으며, 데커드는 별안간 진짜 구원을 획득합니다. 그것은 필립 K.딕이 마련한 정말로 불가해한 클라이막스입니다. 그는 안드로이드를 은퇴시키는 것이 사실은 살인이고 잘못된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어쨋거나 그 일을 계속해나가기로 합니다. 계시를 통해, 데커드는 어쨋거나 자신의 직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직업윤리를 부여받습니다. <안드로이드는...>의 이야기는 결국 모든 갈등을 해결하고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는 중년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어요. 아내는 반대하고, 자신도 윤리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지만, 어쨋거나 그 모든 요소들과 화해하고 일에 있어서도 성공하지 않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안드로이드나 가짜 기억과 같은 몇몇 SF의 소재들과 필립 K.딕 특유의 음울하고도 과시적인 문체가 결합되면 짜잔, 하고 <안드로이드는...>이 나오는 거에요.

<안드로이드는...>는 제가 처음으로 읽는 필립 K.딕의 장편이기도 합니다. 아마 한동안은 필립 K. 딕의 퍼스널 베스트로 남아있을 거에요. 일단 명성이 자자한 <높은 성의 사나이>를 읽어 보기 전까지는 이 목록을 수정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by 이녘 | 2008/02/20 22:33 | For fiction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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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hermes at 2008/02/21 00:57
높은 성의 사나이는 시대가 변한 관계로 시의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죠. 특히 동양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Commented by 카방글 at 2008/02/21 13:40
황금가지에서 판권 사서 낸다고 한게 엊그제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음
Commented by 이녘 at 2008/02/23 22:10
hermes님// 학교 도서관에는 없네요. 그래도 <안드로이드...>보다는 구하기 쉽겠죠, 뭐.

카방글// <블레이드 러너> 리메이크라도 하면 단박에 나올텐데.
Commented by 191970 at 2008/02/26 10:30
흠. 높은 성의 사나이는 쫌 많이 재미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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