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 07일
다크 나이트

<배트맨 비긴스>는 저에게 아주 낯선 배트맨 영화였습니다. 팀 버튼으로부터 시작한 음울하고도 과시적인 고담시의 세계에 익숙하고, 또한 사랑하였던 저로서는 <배트맨 비긴스>의 기획이 기이하게 느껴졌습니다. 팀 버튼의 고담시는 기본적으로 기괴한 동화에 가까운 세계였어요. 거기에는 음울하고도 과시적이며, 또한 화려한 광기가 있습니다. 배트맨이나 조커, 펭귄맨, 캣우먼 같은 캐릭터들은 비현실적인 자신의 모습을 마치 오페라의 가수처럼 과시적으로 뿜어내고 있었죠. 저는 이 시리즈들을 어른이 즐기는 불편한 동화처럼 감상했습니다.
하지만 <배트맨 비긴스>는 어떤가요? 크리스토퍼 놀란은 시치미를 뚝 떼고 이 코스튬 도착자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브루스 웨인의 정의에 대한 갈망이란 너무도 심각하여서 조금은 우스꽝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통과제의를 이루게 되는 히말라야의 어느 닌자 양성소-_-를 보세요. 시대와 공간적 배경을 완전히 무시한 이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은, 그러나 또 꽤 어울립니다. 아주 진지하지만, 또한 어쩔수 없이 현실적으로 얄팍한 <배트맨 비긴스>의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배트맨의 각종 가제트와, 그의 신체적 능력은 어느정도 현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적인 묘사와 배트맨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코스튬이 다소 이질적으로 겉도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크 나이트>는 조금 더 나아간 <배트맨 비긴스>입니다. 그의 가제트들, 그의 초인적인 힘은 첨단과학과 군수산업, 거대자본이라는 힘 위에 기초해 있습니다. 조커와 배트맨의 관계도 생각보다는 훨씬 현실적입니다. 무정부주의적인 테러리스트와 음지의 초법적 수행자라는 구도가 단순한 메타포 이상임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조커가 활용하고 있는 미디어, 끔찍한 장면이 담겨 있는 비디오 테이프. 그리고 미국의 영토를 벗어나 힘을 행사하는 배트맨이 과거 CIA의 전략을 활용하는 장면, 무제한적인 도청을 통해 정의를 수행하는 장면 등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히스 레져의 조커는 끝임없이 자신의 내면속으로 침잠하는, 음울한 동화의 그림자를 늘여뜨리는 팀 버튼의 조커가 아닙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동기로 고담시(미국)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잭 니콜슨의 조커가 과시적인 광대이고 히스 레져의 조커는 우울증적인 캐릭터라고 하는데... 오히려 잭 니콜슨의 조커는 개인적인 컴플렉스와 복수심에 가득찬 내면적인 인물이고 히스 레져의 조커야말로 자신의 분노를 사회적으로 표출하는 과시적 사이코에요.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는 팀 버튼과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닮았습니다. 둘 다 자신의 분노를 바깥으로 표출하는 초법적 인물들이잖아요? 조커가 배트맨 코스튬을 한 남자에게 빨간 입술을 그려넣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퍽 상징적이지요. 저는 그 모습을 그린 포스터를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데, 그것은 배트맨과 조커가 동기와 지향점은 다를 지라도 굉장히 닮은 원리를 통해 움직인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일종의 상징으로 만들려 하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개인적 분노를 사회적 차원으로 터뜨리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조커가 배트맨에게 가지고 있는 집착의 의미가 해명되는데... 이러한 관계가 두 초법적 세력, 미국과 테러리즘의 메타포로 이어지는 순간 영화는 아주 수상쩍어져요.
배트맨이 사용하는 각종 폭탄들이나 공중침투, 인질을 구하는 액션등이 어쩔 수 없이 스파이 영화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 영화는 거의 테러리스트에 대항하는 음지의 기관의 인물을 다룬 첩보액션에 가깝습니다. 강박적인 정의감에 사로잡힌 주인공과 불가해한 사이코 테러리스트라는 구도는 거의 시대착오적으로 전통적이기도 하죠. 이 영화가 가져오는 어떤 찝찝함은 이러한 구도에서 기인한 바가 커요. 저는 조커가 배트맨에게 거는 모든 게임이, 그 둘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메시지라고 생각했어요. 조커가 배트맨에게 느끼는 불가해한 집착도 동류에 대한 일종의 애증이구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슈퍼히어로물의 자기파괴적인 서사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결말부에 이르러 <다크 나이트>는 안전한 슈퍼히어로의 공식 속으로 돌아오게 되요.
혹자는 <다크 나이트>를 부시 치하의 미국의 질서유지에 곧바로 연결시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다크 나이트>가 미국 중심의 질서와 슈퍼 히어로물의 한계를 드러내보이는 역설적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진실은 어느 것일까요? 제 생각에 <다크 나이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만든 정통 슈퍼히어로 액션입니다. <다크 나이트>의 전략은 <스파이더맨>의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자신에게 주어진 거대한 힘과 그 책임이 주는 희생, 인간을 초월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와 인간이고 싶어하는 자아 사이 어정쩡하게 머물고 있는 슈퍼히어로를 시치미 뚝 떼고 진지하게 다루는 거지요. 가끔 터무니 없을 정도로 복고적이되기도 하구요. 실제 배트맨의 이야기를 카툰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크 나이트>가 얼마만큼 오리지널을 계승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50년대의 배트맨의 팬들이 머리 속에 그렸을 배트맨 이야기와 아주 흡사하지 않을까해요. 저로서는 그게 조금 아쉽습니다. 저는 <다크 나이트>의 브루스 웨인을 강박적으로 정의수행에 사로잡힌 복수자 정도로 생각하고 싶어요. 하지만 브루스 웨인이 그것을 뛰어넘어 정말로 고담시의 초법적인 집행자가 될 때 영화는 조금 수상쩍어집니다. 엔딩이 주는 여운이 어쩐지 허전하기만 한 것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이러한 점 때문에 <다크 나이트>가 재미없는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밤의 고담시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액션, 특히 거대한 트럭이 직각으로 솟구치는 장면이 주는 쾌감은 어마어마하죠. 공중에서 쿵쿵 떨어져대는 배트맨이 주는 압도적인 존재감도 좋구요. 히스 레져가 연기한 조커는 아주 음산합니다. 쩝쩝 입맛을 다시는 히스 레저의 조커는 잭 니콜슨의 화려한 조커가 갖지 못한 음산한 박력같은 것을 갖고 있기도 해요. <배트맨 비긴스>가 팀 버튼과는 다른 또 다른 배트맨 이야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다크 나이트>는 '조커'를 통해서 팀 버튼이라는 선배와 정면승부를 펼친거죠. 결과는 어느정도 성공적입니다. 히스 레져의 죽음과 함께, 그의 조커는 아주 오랫동안 회자될 것입니다. 잭 니콜슨의 조커가 하나의 전설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요.
# by | 2008/08/07 22:36 | For movie | 트랙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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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배트맨이 아니고 아이언맨이었다면? 다크나이트 스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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