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일요일

 

아아, 나른해요. 오늘은 원래 명동에 갈 계획이었지만, 함께하기로 했던 동행이 가족들과 오리고기를 먹으러 가겠다며 저를 바람맞혔어요. 바람맞은 것 보다 오늘 저녁에 먹을 것이 계란 후라이 밖엔 없다는 사실이 더 서러워요. 나도 오리고기 먹고 싶은데...
할 일 없이 침대에 누워 보르헤스를 읽고 있는데, 이 아저씨 글이 또 사람을 나른하게 만든단 말씀. 끝 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다가도 어쩐지 장엄하고 쓸쓸한 결말들을 읽고 있노라면 세상이 다 덧없게 느껴져요.

기운을 차려보려 일어서보아도 무슨 뾰족한 수가 나는게 아니네요. 할 일 없이 즐겨찾기를 오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우선 학교 멀티미디어실에 <인랜드 엠파이어>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재빨리 신청해주었습니다. 오래전에 <트윈픽스> 시즌 1도 신청한 것 같은데 없네요. 아마 심사에서 잘렸나봐요. 또 제 시간표로는 공강시간에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러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후우. 학교 가까이 대한극장 같은 곳에서 걸어주면 좀 좋으련만. 압구정 까지 갔다가 되돌아와 수업에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무척 애매하네요.

티켓링크를 뒤지다 발견한 건데, <중경삼림> 압구정에서 상영되고 있군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왕가위 영화는 <동사서독>이지만 <중경삼림>도 좋아해요. 왕비가 무척 예쁘게 나오거든요. 비슷한 이유로 <2046>도 좋아하죠. 왕가위 영화 중에서는 제일 재미없는 영화였지만...-_-

마찬가지로 시간이 안 맞아요. 이 영화도. 학교 멀티미디어실에 신청하고는 봐야겠어요, 아무도 없는 작은 영사실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호젓함을 즐기고 싶습니다. 가끔 낮잠을 자러 오는 학생이나 어두운 곳에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커플 때문에 방해 받기도 하지만. 음흠.

아아, 시간은 줄기차게 흘러가는데 의욕은 생겨날 여지가 안 보이네요. 뭐 재미있는 일 없으려나요.

by 이녘 | 2008/03/16 17:59 | For me | 트랙백 | 덧글(2)

말타의 매

 

사립탐정인 샘 스페이드는 동료인 마일스 아쳐와 함께 사립탐정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작과 함께 브리짓이라는 여자가 그의 사무실을 찾아오고, 그녀는 서스비 라는 사내와 함께 사라진 자신의 동생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합니다. 그 날 서스비의 미행에 나선 마일스는 총격을 당해 사망하고, 그가 미행하던 서스비도 사망합니다. 경찰들은 샘 스페이드가 마일스의 아내인 이바와 내연의 관계였다는 제보를 받고는 그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자, 이렇게 <말타의 매>는 시작합니다. <말타의 매>는 누아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쿨하고 시니컬한 주인공, 팜므 파탈, 무능한 경찰, 속임수, 돈. 이 모든 클리셰들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말타의 매>는 굉장히 생생하고 힘있는 영화가 됩니다. 저는 이 점을 샘 스페이드를 연기한 험프리 보가트에게 돌리고 싶어요. 그의 샘은 정말이지 기가 막힙니다. 그는 저 모든 약호들을 홀로 가로지릅니다. 그는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지도 않으며 경찰을 무작정 혐오하지도 않고 돈을 밝히면서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홀연히 사랑에 빠졌다가도 냉담하게 발을 뺍니다. 그는 어떠한 순간에도 자신의 속내를 열어보이지 않아요. 브리짓이나 캐스퍼 거트먼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발 담구고 있는 속고 속이는 장르 세계에서 크나큰 장점입니다. 샘 스페이드는 모두가 모두를 속이는 이 세계에서 단연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굉장히 능숙한 전문가입니다. 쉴 새 없이 지껄이고 연기하고 사람들을 속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이 자는 언뜻 이 뻔해보이는 이야기에 생생한 힘을 불어넣어요. 그는 쓸데없이 정의감에 넘치지도 않고 순진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완전히 속이 닳은 것도 아닌 인물입니다. 재미있어요.

조연들의 연기도 재미있습니다. 브리짓과 카이로, 거트맨 등의 악당들은 적당히 스테레오타입입니다만, 굉장히 능숙하고 천연덕스럽게 연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카이로의 장난스럽고 거트맨의 거창한 몸짓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웃음을 실어줍니다. 카이로의 게이농담 같은 경우엔... 이 시기에도 이런 종류의 농담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나요? 너무 천연덕스럽게 나와서 오히려 어리둥절 했어요.

하여튼 1941년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놀랄만큼 능숙하고 장르적으로 세련되어 있습니다. 이러니 거장이요, 명작인 것이겠지요. 이 영화는 존 휴스턴 특별전이 하고 있는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몇몇 영화를 더 보러가야겠어요. 비교적 초기작인 이 영화의 수준이 이 정도이니 작가로서 완성되어가는 시기의 영화를 한 번 보고 싶습니다.

by 이녘 | 2008/03/16 12:08 | For movie | 트랙백 | 덧글(2)

그가 돌아온다.

 

영구의 귀환인가요. 심형래는 그 자신이 감독하고 주연하는 <라스트 갓파더>로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한국수출보험공사의 보험대상 1호로 지정되어서요. 기사에 따르면 <라스트 갓파더>는 비록 수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더라도 투자금의 70퍼센트를 보험으로 복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굉장하죠?

심형래는 나름 용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그는 영화감독으로 전향한 이래 크고 화려한 영화에 집착해왔습니다. 영화에서 개그의 채도를 점점 낮추고 헐리웃처럼 보이는 모양새를 획득하는 것이 그 목표였죠. <D-WAR>는 그 정점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의 정점에 있는 <영구와 땡칠이>나 <우뢰매>가 어디 모양새가 그럴싸해서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닙니다. 영구라는 걸출한 캐릭터가 있었고 심형래의 단련된 슬랩스틱 연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죠. 그 눈에 띠게 엉성한 연출은 구수한 키치냄새를 팍팍 풍겼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참 좋아했지요.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라스트 갓파더>는 '영구, 미국에 가다'쯤 되는 모양입니다. 심형래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작품은 바로 '미스터 빈', 나쁠 것 없습니다. 물론 '미스터 빈'은 영어문화권의 영국에서 크게 성공한 캐릭터였고 애초에 굉장히 친숙한 문화경험이며, 또한 그러한 모델이 계속 나와 생산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심형래의 영어연기 또한 굉장한 리스크이지만... 뭐 이거야 아무도 확신을 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걱정은 되지만 응원을 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제가 가장 아리송한 부분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되살린 말론 브란도입니다. 아니. 미스터빈 식 영화에 컴퓨터 그래픽 말론 브란도가 나와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라도 만들고 싶은건가요. 영구식 영화들, <미스터 빈> 시리즈가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영화가 기술적으로 세련되고 어마어마한 컴퓨터 그래픽을 과시해서가 아닙니다. 독특한 캐릭터에 기반하여 일상의 사건들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그 뻔뻔한 일탈에 있죠. 사실 저런 영화에는 정말 대단한 배우가 참가하는 것이 좋은 일만도 아닙니다. 아릿한 싸구려향, 키치적인 분위기가 제거되는 순간 영화는 힘을 잃고 말 거에요.

심형래가 굳이 '컴퓨터 그래픽 말론 브란도'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사실 영화 외적인 이야기입니다. 그의 '영구아트무비'는 헐리웃 수준의 특수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에게는 '영구아트무비'의 기술력을 계속해서 사용해야하는 사업가적 책임이 있지요. 그런 이유로, 심형래는 자신의 영화에 맞건 맞지 않건 CG작업을 통해 돈을 쏟아붇고 회수할 아이템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무척 기형적이에요. 그가 기획하는 영화는 로맨스건 코미디건, 다큐멘터리건 일단 컴퓨터 그래픽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구아트무비'라는 수백억원이 투자된 인력집단이 놀게 되거든요.

심형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지난 <D-WAR>의 실패로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그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란 영구아트무비를 외주를 받는 회사로 바꾸어 그 대단한 컴퓨터 그래픽이 필요한 곳과 같이 일하는 것이고 그는 그가 만들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겠습니다만...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고 언론플레이를 통해 충무로와의 사이를 일부러 더욱 벌려놓은 그는 어찌되었든 영구아트무비를 자급자족적인 영화기계로 만들어야 하는 거에요. <라스트 갓파더>는 그 딜레마가 모두 모여 전시되는 기획입니다.

뭐, 심형래도 바보가 아닌 이상(2) 이 영화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도배할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기획도 아니구요. 하지만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우스꽝스럽고 불필요한  '컴퓨터 그래픽 말론 브란도'를 넣지 않을 수도 없을 거에요. 이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입니다. 심형래의 입장에서는요.

by 이녘 | 2008/03/15 11:05 | For movie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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